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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삶의기술' 기고] 봄의 들

by 농민, 들 2018. 5. 28.

올해는 하루의 반은 밭에서, 반은 사무실에서 일하기로 했다. 농사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되도록 사무실에서는 낮 4시부터 저녁 8시까지만 일한다는 게 나만의 규칙이다. 머리와 몸을 골고루 쓰겠다는 다짐이자, 균형 있는 삶을 살겠다는 각오다.

 

앞으로 하루의 반을 보낼 사무실은 작은 시골마을 논밭 한가운데 있다. 내가 태어난 해, 아빠가 아빠 친구들과 지은 가건물 시멘트 집이다. 엄마 아빠의 신혼집이자, 나의 고향. 들에 드문드문 있다하여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벌뜸이라 부른다. 지도에 없는 마을 벌뜸은 나와 아빠의 고향이자, 아빠가 평생 농사짓고 살아온 곳이다. 농사로 빚이 늘어난 아빠는 꽤 많은 땅을 팔았지만, 벌뜸만큼은 지키고 싶어 했다. 젊은 시절, 다른 집 논밭을 갈아주고 받은 품삯을 아끼고 아껴 산 땅. 엉성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기른 땅. 아빠가 오랜 시간 보듬어 온 이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꿈꾼다.



마을/농민조직에서 일한 10

나는 지난 10년간 지속가능한 농업을 공부하고, 마을/농민조직 실무자로 일했다. 당시의 난 농업 현주소를 정확히 짚는 사람, 농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아는 사람, 이상향과 현실적인 목표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었다. 조직에서 경험한 현장은 공부와 토론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실천이 되길 바랐다. 농민운동가이고 싶었다. 하지만 조직은 너무 바빴고, 가부장적이었다. 이론과 실천의 분업이 철저한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난 수장이 정한 조직 입장을 고민 없이 되풀이해 쓰고 말하는 무지하고, 무기력한 직원이었다. 몇 년째부터였을까. 농민집회에 나가 구호를 외칠 때마다, 나 스스로를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으로 느낀 게. 더 이상 청년이 우리 농업(마을)의 미래라든가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들이 위로가 않던 어느 날, 난 퇴사했다.


앞으로는 내가 아는 것만 말하고 싶었다. 작고 느리더라도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공부하고, 고민하고, 실천하고 싶었다. 주변에서는 만류했다. “곧 결혼해서 애 낳을 가능성이 큰 나이인 너를, 활동가로 키워줄 조직이 또 있을까라는 진심어린 협박도, 이제 자리 잡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도 내겐 들리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사는 것보다 고용불안으로 사는 게 나았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 내가, 나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다양한 세계와 농업, 농민을 찾아 나선 시간


퇴사 후 나는 자유롭게 욕망하며,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다녔다. 개인의 욕망을 하찮게 여긴 채, 공적인 사고를 강요했던 지난 10년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 세계에 갇혀 산 지난 날 나에게 본때를 보여주듯, 다른 세계를 신나게 넘나들었다.

가장 먼저는 인류에게 필요한 기술을 내 멋대로 꼽고, 익혔다. 농사, 요리, 마사지. 마사지를 배워 친구들에게 해주고, 텃밭을 가꾸고, 밭에서 나온 것을 책임지고 요리해 먹었다. 나의 언어로 글을 쓰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벌이기도 했다.

다른 나라 농촌에 가서 새로운 농민들을 만났고, 농촌/농업에도 다양한 존재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농()저널 농담과 농촌페미니즘 캠프를 시작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과 닮은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농업 진로교육을 하고, 농민들이 팔지 못 한 농산물을 팔며 10년 동안 언어만으로 고여 있던 것을 몸으로 풀어냈다.



ⓒ 박푸른들



농사를 짓겠다는 결심


어느 덧 나는 농민이 되고 싶어졌다. 농업에 대한 추상적인 당위와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농민의 몸으로 직접 농업을 이해하며, 농민 동료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농업과 삶을 지속하고 싶어진 것이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농민, 개인의 이익만이 아닌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농민. 난 전업농이 되기로 했다. 청년 전업농으로서 겪는 나 개인의 문제가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 생각하며,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 것이다. 조직에 속해 잘 모르는 구호를 수동적으로 외칠 때보다, 훨씬 농민운동가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삶이 될 수 있을 거라 상상하며.


당장 올해부터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필요했다. 땅을 구하려면 농사규모를 계산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얼마만큼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 혼자 농사규모와 농산물을 정한다고 해서 농사로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농사지어 먹고 산다는 건, 농산물을 팔 때나 가능한 말인데, 난 팔 곳이 없었다. 농산물 출하가 가능한 조직에 들어가 판매하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또 누가 나를 알아주고 팔아줄 것이란 기대로 마냥 농사를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건 초보농민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농민의 딸이기도 한데, 평생 농민으로 살아온 아빠는 자주 고단해했다. 농업에 대한 애정이나 자부심은 현실에서 겪는 좌절과는 별개였다. 계속되는 좌절의 경험 때문에, 아빠는 농민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딸인 내게 자신과 같은 농민의 삶을 추천하지 않았다.


내가 만난 농민 대부분은 불균형한 삶을 살았다. 그 중 생산비와 소득은 내가 일한 농민조직에서도 가장 자주, 집중해서 다룰 만큼 대표적인 불균형에 속했다. 아빠를 비롯한 베테랑 농민들도 수확철만 되면 늘 철저히 약자가 됐다. 자신이 기른 농산물인데도 불구하고 농산물 값은 주는 대로 받아야 했고, 농사짓기 전 농산물 출하계약서 한 장 써본 적 없는 삶을 살았다. 곧 내 미래가 될 일이었다. 베테랑 농민과 초보농민이 될 나 모두, 돌파구가 필요했다.


ⓒ 박푸른들

고향마을, 벌뜸 전경.


 


돌파구, 논밭상점


이러한 이유로 난 겨우내 농산물 직거래 웹사이트 논밭상점(http://www.nonbaat.com/)’을 만들었다. 농민이 운영하는 논밭 한가운데 작고 느린 상점. 퇴사 후 2년 동안 운영한 농산물 직거래 블로그 유자(유기농 자립)프로젝트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이곳에서 난, 우선 나와 내 동료 농민들의 농산물을 팔 예정이다.


나는 농민들이 균형 잡힌 생산과 소비/생산비와 소득/일과 휴식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길 바란다. 앞으로 농민으로 살게 될 나 또한, 내가 균형 있는 삶을 살게 되길 바란다. 나는 논밭상점을 통해 나와 농민들에게 필요한 균형을 찾고자 한다. 이에 논밭상점의 첫 번째 목표를 나는 농산물 판매로 잡았다. 농민이 정당한 권리를 갖고, 건강히 농사지을 수 있길 바라며 정한 목표다. 전국 모든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책임질 수는 없겠지만, 각박한 농업현실에서 농민들에게 돌파구는 많을수록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게 지난겨울, 그리고 겨울과 봄 사이 난 농민이 될 나와 주변 농민들의 돌파구를 만드는 일을 했다.


우리 마을은 봄비가 많이 내렸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다보면 비가 또 내리고, 또 내리고. 다행히 일주일 전 멈춘 비는 아직 다시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내일이면 밭이 다 마를 것 같다. 내일이면 드디어 나도 농사 시작이다.

 


- 2018, 봄의 들에서. 농사짓는 들(논밭상점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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