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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푸른들 시선

[푸른들 시선] 기억그릇

by 농민, 들 2014. 10. 20.

<농저널 농담> 박푸른들



ⓒ 2014.9.12 강원도 홍천 메밀밭클라우드에서 겨우 찾은 사진 중 하나



오랜 시간 준비한 일을 마무리하던 찰나 컴퓨터가 고장 났고, 컴퓨터 디스크와 함께 그동안의 일이 날아갔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A/S 센터에 가면 찾아줄 거니까.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연히 컴퓨터는 내가 모르는 사이 나의 작업을 모두 기록해두었을 거라는 기대. 하지만 A/S 센터 기사는 디스크와 함께 모든 기록이 날아갔다고 말했다. 모든 기록. 두 눈으로 감상하기 보다는 카메라 액정을 보며 찍은 사진들, 갈겨쓴 글들, 이것도 추억이라며 지우지 않았던 예전에 사귀던 사람과의 데이트 사진, 묵혀둔 여행기록, 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하며 악착같이 모아둔 자료들… 모두.

 

포맷된 컴퓨터를 들고 집에 오는 길 잊고 싶지 않았지만 보고 싶지는 않았던, 그래서 모아두기만 한 파일들이 떠올랐다. 기억의 재료들이 사라져 아쉬웠지만, 한편 홀가분했다. 물론 어떻게 하면 인터넷에 남아있는 파일을 찾을까 라든지 다음에는 파일을 날리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과 함께,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며 정리를 해야 한다는 숙제로부터의 해방감과 작지만 온전한 나의 기억그릇이 생겼다는 기쁨이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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