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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기고

[기고] 씨앗과 기록

by 농민, 들 2018. 2. 4.

씨앗이 식량의 출발

기록은 삶의 출발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석사과정> 담



“인류의 가장 큰 발명은 단연코 농사다. 농사를 통해 인간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고 농사로 얻은 잉여생산물 덕분에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다. 또 유목민으로 떠돌던 삶이 정착을 시작했고, 이후 인류 앞에는 찬란한 문명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인류는 놀라운 과학기술로 날마다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 디지털 사회라 할 지라도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원초적일 수 밖에 없고, 그 기본이 충족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가장 원초적인 것을 지키는 공간인 씨앗저 장소는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장소다. 씨앗은 우리의 생명이고 재산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지은경, 세바스티안 슈티제, <인류의 생명저장소, 스발바르 세계 씨앗저장소(Svalbard Global Seed Vault)>, ⟪매거진 책Chaeg⟫, May, 2016.

http://www.chaeg.co.kr/스발바르-세계-씨앗저장소



‘스발바르 세계 씨앗저장소’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들었던 느낌은 ‘안심’이었다. 인류 최후의 날(doomsday)이 도래 하더라도, '저장소'가 그 멸망을 막지는 못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게는 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최후의 날이 오면 나도 죽고 없을텐데 나는 왜 안심하는가? 저장소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저장소는 무엇을 보관하는 것일까?


씨앗은, 먹고 사는 인류의 모든 시작이다. 씨앗을 지킨다는 것은 식량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여 씨앗을 모은다는 것은 너울대는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의 삶을 모으는 것이기도 하다. 최후의 날이 지나더라도, 씨앗저장소의 문 앞에서 삶이, 그리고 문명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저장소는 여러모로 아카이브와 많이 닮아있다. 저장소가 씨앗을 모으듯, 아카이브는 기록을 모은다. 남겨진 씨앗이 미래의 사람들에게 농사를 통해 삶의 지속을 가능케 하듯, 남겨진 기록은 인류가 가꾸어온 문명의 유지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평등, 민주, 자유와 같은 사회적 가치, 개인과 공동체의 존재, 예술 작품, 인간의 삶과 일의 기억 같은 것들이다.


북극해 ‘스발바르 제도’라는 곳에 있는 이 ‘씨앗 아카이브’로부터, 우리는 아카이브의 핵심 기능인 ‘수집’과 ‘보존’의 중요성을 새삼 배우게 된다(물론 씨앗저장소가 보존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장소는 ‘종자은행’처럼 수집물의 적극적인 활용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2016.12.8). 보존기록물의 정리와 활용이 부재함을 늘 절감하고 아쉬워하지만, 한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과 사회에 대한 더 넓고 깊은 기록화, 그리고 전기로부터 독립이 가능한 기록 보존이 아닌가? '최후의 날'을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우리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느껴진다. 지진, 핵, 원전이 초래하는 위험은 우리의 일이다. 따라서 아키비스트의 미션 중 하나는, 출렁이는 지구의 위험 속에서 문명의 기록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렇게 애써 모아 보존하는 물건들의 공통점이 바로 '쓸데없는 것'이라는 데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비현용 (non-current use)'의 의미를 포함한다. 하지만 현재 쓸데없는 것은 앞으로도 쓸모없는가. 현재 소용없는 것의 가치를 정당하게 판단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수많은 수집가들이 현재 소용없는 것을 굳이 공들여 모으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렇게 공들여 모아진 기록과 모으는 사람들을 위해, 아키비스트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나.


이것은 결국 아카이브가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것'을 모으는 아카이브는 왜 존재해야 하나? 질문은 이어지고, 우리는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내가 섣부르게 예단하는 답변은 아카이빙은 삶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적극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흔히 이야기하는 ‘공공’과 ‘민간'이라는 기록 구분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씨앗저장소 옆에 세계의 기록을 보관하는 기록보관소가 개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경향신문 2017.4.5). 이곳에, 지구 곳곳의 기록들이 모여들고 있다. 씨앗 옆에 보관되는 기록은 상징적이다. 씨앗이 식량의 출발이듯, 기록은 삶의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북극 스발바르의 ‘노아의 방주’…미래 담긴 씨앗들>, 경향신문, 2016.12.8.

<씨앗 저장 ‘북극의 방주’ 옆에 세계기록보관소 개관>, 경향신문, 2017.4.5.



ⓒ농민, 농업단체 실무자모임 농땡이



※ 이 글은 서울기록원 페이스북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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