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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농촌페미니즘

[농촌퀴어쏠의 그냥 리뷰 / 5월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by 농민, 들 2018. 5. 22.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피해는 사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정치의 산물이다.


미투 운동 이후 더 많은 여성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낱낱이 폭로하지만, 무엇이 바뀌고 있긴 한 것인가-하는 회의적인 생각만 든다. 우울하고 힘이 없을 때 정희진 씨의 글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읽고 난 뒤 힘을 얻은 글의 한 부분을 당신과 나누고 싶다. 혹시 나처럼 회의감에 절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 글이 위로가 될 수 있기를



ⓒ 교양인



 

p. 208~212 발췌

 

인류역사상 사회적 약자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해와 피해는 일상이지만,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가.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원 버스 안에서 발을 밟혔을 때,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 나의 작은 선의가 조롱당할 때, 옆집 공사로 건축 폐기물 먼지에 시달릴 때, 비오는 날 지나가는 버스가 흙탕물을 튀겨 옷이 엉망이 됐을 때, 조금 좋은 일을 하려다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할 때, 성폭력을 당했을 때,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 임금 차별을 당할 때, ‘묻지마 폭력을 당했을 때 등등.

 

이중 어떤 문제는 개인적, 미시적, 가벼운 피해이고 어떤 사안은 구조적, 거시적, 심각한 피해인가? 구조와 무관한 개인적인 문제는 없다. 또한 모든 사회 문제는 연동하기 때문에 구조와 개인, 공과 사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피해의 위계는 더욱 위험하다. 사람들은 내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피해에 대한 개인의 반응 범위 또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이 복잡한 인간사다. 득도한 사람도 있고 오랜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도 있다. 이것은 근본적이며 실존적인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피해 사실은 만들어 가야 할 역사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도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군 위안부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오랜 세월 동안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사태였으며, 4.3사건은 아직도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는 어떠한가. 이 사건은 단순한 교통사고일 수도 있고, 국가 폭력일 수도 있다.

 

피해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으로 발명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모든 피해 담론이 새로운 지형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된다. 피해자가 여성이며 피해의 성격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것일 때,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법체계로만 한정해서 말하면, 처벌 여부가 아니라 사건의 성립 자체가 쟁점이 되기 때문에 여성의 피해는 재판은커녕 기소 단계까지 가기도 어렵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행동과 성격과 생활 방식 전체가 문제시된다. 또한 나를 포함하여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다. 신고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부정하고 여성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피해는 인정 투쟁, 집단 행동, 사회 운동, 여성주의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실천을 통해서 사회적 합의 도달해 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저절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는 존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해자 되기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위치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피해자가 피해를 인정받는 과정에는 환골탈태할 만한 고통스러운 몸의 변화를 겪으면서 다른 인간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여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몸은 기억 장치로서, 자신의 경험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이 때 글자 그대로 사지를 재조합하는 육체적 고통이 동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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