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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농땡이

[텃밭망상] 1호. 당신아

by 농민, 들 2014. 6. 27.

6월 들어서는 텃밭을 돌보느라 텃밭에 대한 글을 쓸 여력이 없다는 병문씨가 5월에 농담에 투고한 텃밭망상 1입니다.

텃밭망상은 초보농부 병문씨 형편에 따라 연재됩니다. [농저널 농담]

 

<농저널 농담> 전병문

 

 

 전병문. 1985년생이지만, 1945년생의 머리숱과 액면가를 지녔다. 서른 살 다되도록 불타는 주둥이로만 부끄러움을 가리며 살다가, 최근에 텃밭을 만들고 나서, 말로써 다 가릴 수 없는 공간이 있음을 새삼 깨닫고 전율 중에 있다

 

 당신아, 사람처럼 질기고 더럽고 추잡스럽고 비겁한 생물이 또 있을까요.

 

 서울대 출신 미모의 웹툰 작가로 데뷔 때부터 인지도가 높았던 무적핑크 양의 작품 중 "경운기를 탄 왕자님" 이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어요. 비싸기로 소문난 강남 알토란 땅에서 농사를 짓는 럭셔리 농부에 관한 코믹 웹툰이지요. 내가 만약 이쪽 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눈 여겨 봤을지는 의문이지만, 여하튼 너무 빨리 엔딩을 맞이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재미나고 즐거운 웹툰이었습니다.

 

 내가 아직 말을 아니 했던가요. 베란다 앞 쪼그마한 화단 앞에 부추와 열무를 눈치껏 심었어요. 웹툰 작가 주호민이 "신과 함께" 에서 대별왕의 입을 빌어 말하듯 "햇볕과 물, 공기만으로 생명이 태어나는 세상" 은 얼마나 경이로운가요. 하루하루 싹을 움틔워 자라는 부추와 열무는 애틋하기 짝이 없었어요. 괜히 애착도 더 가구요. 그래서 내친김에 연휴를 맞아 고추와 취나물, 더덕, 가지 등을 눈치껏 더 심었습니다.

 

 인대가 군데군데 찢겨나간 양 무릎이 아니더라도, 농사는 정말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아주머니들 틈바구니 사이에 끼어 취나물(두 번이나 취마눌, 로 오타가 나는군요. 나는 정말 당신처럼 취할법한 마눌을 얻고 싶은 걸까요?) 과 더덕을 캐고, 부탁해둔 가지 모종과 고추 모종을 가져와 열 맞춰서 쭉 심었지요.

 공무원들 눈총과 감시를 피해서 땅을 고르고, 고랑을 파는 번거로움을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허리와 무릎이 아리고, 목은 뻣뻣해지고 어깨는 찢어질 거 같은데, 때마침 한차례 비가 쏟아지고 난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차갑게 몰아쳐 와서, 도통 계절 구분도 안 갈 지경이었어요.

 

 정말이지 사람이란 다시 말하지만. 당신아, 얼마나 질기고 더럽고 추잡스럽고 비겁한 생물인가요. 어느 생명은, 그저 햇볕과 바람과 물만 가지고도 제 한 몸 푸르게 유지해가며 곱고 아름답게 사는데, 또 어느 생명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을 취해야 하고, 그도 모자라서 심지어 제 입맛에 따라 다른 생명을 재단하고 제멋대로 바꾸기까지 합니다. 양영순의 말처럼 "배고프지 않아도 먹는 인간의 욕심" 보다 더 큰 물리적 오류는 이 우주에 없기 때문일까요. 생각해보면, 가지나 고추 모종은 그렇다 쳐도, 멀쩡하게 잘 지내던 더덕과 취나물을 산채로 캐와 다른 곳에 심었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을까요.

 

 그래서 오늘부터 다니게 된 새 교회의 젊고 잘생기고 예리하게 생긴 목사님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그토록 말씀하셨나봅니다. 새 교회는 더 크고 넓고, 깨끗하지만, 역시 적당히 단촐한 곳이었어요. 젊고 잘생긴 목사님만큼이나 세련된 미모의 사모님은 음식도 어찌나 잘하시는지, 매콤한 제육볶음과 달짝지근하게 삶은 양배추와 적당히 새콤하게 익어 아삭아삭한 배추김치와, 꼬들꼬들한 쌀밥을 놓고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리고 옅은 커피 한 잔씩을 놓고 오랫동안 이야기했지요. 감비-삼동교회의 목사님 아래서 부드럽게 신앙의 기본을 다시 배웠다면, 지금의 목사님은, 그보다 분명 한 단계 높은, 혹독하게 단련된 신앙을 요구하고 계셨어요.

 그 신앙의 첫 번째 걸음이란, 다름 아닌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임에도, 하나님과 분리되었음에도 돌아가지 않으려는 원죄를 지은 이들임에도, 우리는 늘 우리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이성과 윤리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과 하나님을 판단하려 하지요. 이보다 더 큰 오류와 불경함과 오만함이 있을까요. 아주 세속적으로 생긴 목사님은, 그러나 누구보다 엄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할 것을 요구하고 계셨어요.

 나는 쭈그리고 앉은 채로 기름지고 거무죽죽한 땅의 속살을 제치며, 습기어려 축축한 흙 안에 생명들을 심으며, 그를 생각했습니다. 땅이 싹을 받아들이고 움틔우는 것처럼, 정말로 많은 이에게 욕먹고 미움 받고, 또한 나조차도 때때로 전혀 포용할 수 없는 부족하고 더러운 내 자신조차 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이에요. 물론, 당신 생각도 아주 많이 했습니다.

 

 날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습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그 날은 추운 겨울이었고, 우리는 빨리 어두워지는 하루를 아쉬워하면서, 우리의 가난한 저녁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얼어붙은 초등학교를 서로 손 붙잡고 걸었지요. 크고 헐렁한 코트를 입은 채, 나보다 키 큰 당신이 저녁노을 받아가며 조심스럽게 내 옆을 함께 걷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지요.

 바람은 뼈를 조일 듯 더 차가워지고, 나는 서둘러 내려왔습니다. 줄기가 끊어진 탓에 뿌리가 없어 심을 수 없었던 취나물들은 가볍게 삶아, 들깨와 기름에 버무려 한 끼의 반찬이 되었지요. 얄궂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고생시킨 노동의 결실이, 이토록 짧은 시간의 즐거움이 되어버리고 말다니요. 당신과의 사랑은 너무 짧았지만, 대신 기다림이 하염없이 길었던 것과 비슷할까요?

 아무튼, 미처 사진을 뒤늦게 찍었어야 할 정도로, 취나물무침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적당히 억세고 질기면서, 동시에 부드럽고 맨질 거려, 입 안에서 매끄럽게 씹히면서 향은 바다처럼 깊게 퍼졌어요. 또 괜한 덧붙임인지 모르겠으나, 마치 당신과의 기억처럼. 우리가 예전에 그랬듯이. 그런데 정말 그 기억이 나만의 기억만은 아니겠지요.

 

 

 

2014년 4월 21일  ⓒ 전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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