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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풀무에서 보내는 편지

[풀무에서 보내는 편지] 두 번째. 엄마에게

by 농민, 들 2014. 3. 23.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환경농업 전공부에 입학한 여연이가 겪고 느끼는 것을 편지에 담아 주변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20대 청년이 학교에서 생태농업과 공동체를 배워 나가는 과정을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농저널 농담> 여연

 

엄마에게

 

안녕, 엄마. 잘 지내고 있어? 여기 홍성에는 봄이 왔는데, 산청은 아직 추울까? 나와 하연이가 없는 집에서 개와 고양이와 닭에게 밥을 주고, 일상적인 일들을 해나가는 엄마의 모습을 종종 상상하고는 해. 이번 주에는 꼭 집에 가서 씨앗도 얻어오고, 일도 좀 돕고 싶었는데. 주말에 집에 가기에는 산청이 너무 먼 곳이네. 어차피 4월쯤 되어서야 한 번 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기대를 아예 놓고 이곳의 주말을 즐기고 있어.

오늘은 일요일이야. 날씨는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꿀벌들이 바쁘게 광대나물과 강아지눈꽃, 산수유 꽃에서 꿀을 모으는 모습이 보여. 작은 덤불과 나무들 위에서는 비둘기랑 까치, 참새와 수많은 이름 모를 새들이 울어대는 주말이야. 학교 식당 옆 작은 화단에는 수선화가 노란 종처럼 햇살 아래에서 흔들거리고 있어. 올해 첫 수선화야!

 

ⓒ 여연

 

주말인데도 아침에 잠에서 유난히 일찍 깼어. 눈을 뜨니 기숙사 방 내 자리 바로 옆에 있는 창문 밖으로 상아빛 달이 걸려있더라고. 창가에 서서 잠시 어스름한 푸른빛에 물든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걸 구경했어. 다시 누워서 눈을 감아봤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떠올라서 도무지 잠이 들 것 같지가 않았어. 그래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호미와 낫을 들고 텃밭에 풀을 매러 갔어.

 

텃밭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할게. 학교 주변에는 2~40평쯤 되는 조그만 밭과 하우스가 여기저기 있어. 신입생들은 학기 초에 자기가 한 해 동안 작물을 길러볼 텃밭을 정하게 돼. 둘씩 혹은 셋씩 짝을 지어서 뭘 심을지 계획하고, 설계와 측량을 하고, 밭을 일궈 씨앗을 심는 거지, 한 가지 작물을 심는 게 아니라, 꽃과 채소를 다양하게 섞어 심어서 텃밭 정원 만들기를 공부해보는 수업이야.

 

나랑 동기 두 명이 함께 맡기로 한 이 텃밭의 이름은 먹을 것을 길러내는 밭이라는 뜻인 먹을밭이야. 작년에 이 텃밭을 맡았던 선배가 가을에 풀씨를 잔뜩 떨어트려 놓았는지, 다른 밭들에 비해서 유난히 풀이 많아. 오늘 아침에는 그 풀을 뽑는 일을 했어.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낫으로 뿌리 위쪽을 걷어내면서 대충대충 빨리빨리 일하려고 했지만, 아직 일이 몸에 붙지 않았는지 쉽게 손이 빨라지지 않았어. 엄마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한심한 일이지. 몇 년 동안이나 엄마 곁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보냈는데, 풀 뽑는 요령조차 채 몸에 익지 않았다니!

 

 

ⓒ 여연

 

새벽에 서리가 내려앉은 텃밭에 앉아,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 요리조리 생각해봤어. 왜 집에 있을 땐 그렇게나 일하는 게 싫었을까? 어째서 그렇게 밭을 지긋지긋하게 여겼을까? 왜 늘 밭일에서 도망칠 생각만 했을까? 다 커서 홍성까지 와 새로 배울 줄 알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텐데.

 

이 생각은 텃밭 일을 할 때만 드는 게 아니야. 실습시간에 산에 가서 부엽토를 긁거나, 장을 담그는 걸 돕거나 하면 집중해서 듣다가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해. ‘, 엄마가 이 일들을 하는 걸 봤어. 그런데 정작 어떻게 했었는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왜 더 주의 깊게 봐두지 않았을까?’

 

다른 건 몰라도, 엄마가 집 옆에서 가꾸는 텃밭정원이라도 잘 봐둘걸 그랬어. 봄에는 수선화와 크로커스와 튤립과 딸기가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넝쿨장미와 백일홍과 바질과 딜이 피고 자라고, 가을에는 대추와 강낭콩과 호박이 열리는 그 어수선하고 멋진 텃밭정원 말이야. 어렸을 때는 그곳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나가서 부추라도 한 단 뜯어오라고 하면 부추가 어디 있어?”하고 눈만 말똥거리다가 엄마의 신경을 거슬러서 욕을 잔뜩 얻어먹고는 했었잖아. 집에서 힘겹고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소설책만 읽지 말고 그 정원도 좀 잘 봐둘걸 그랬어.

아무튼 엄마, 이런 아쉬움을 가지는 건 내가 이곳 텃밭에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먹거나 팔기 위해 짓는 농사는 해가 져도 일이 끝나지 않는데, 이곳에서는 학생이라는 신분 덕에 내게 맡겨진 일들을 하면서 짬짬이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이 텃밭 일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해. 그래서 텃밭이 마치 맘먹은 걸 실행해볼 수 있는 38평짜리 실험실처럼 느껴져! 뭔가를 시도해보기에는 좋은 환경이야. 씨앗 냉장고엔 여러 나라에서 온 채소 씨앗들이 가득하고, 궁금한 걸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선생님도 곁에 있으니까 말이야.

 

텃밭 일은 개인 시간을 내서 짬짬이 해야 하지만, 쳇바퀴가 굴러가듯 정신없이 돌아가는 학교생활에서 오히려 숨통을 틔워주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아직 이른 봄이고, 얼마나 앞으로 얼마나 바빠질지 모르니 확신은 금물이겠지. 모내기철쯤 되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텃밭이 짐스러워지려나?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늘 시작이 강하고 끝이 약한데, 이젠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어떤 일을 꾸준히 해내는 습관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해.

 

ⓒ 여연

 

지난 금요일에는 텃밭에 첫 번째 파종을 했어. 애호박, 주키니, 참외, 토마토, 양배추, 브로콜리, 파프리카, 근대 등을 온실에 있는 포트에 심었어. 시금치와 당근, 순무, 레디쉬, 약간의 비트, 청경채 씨앗은 밭에 바로 뿌렸어. 시간이 없어서 바쁜 와중에도 조심조심 밭을 다듬고, 골을 파고,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흙을 덮었어. 씨앗이 정말 작아서 싹이 날지 의심스런 마음이 들더라고. 왜 엄마가 내게 씨앗 심는 일을 잘 시켜주지 않았는지, 이젠 알겠어.

 

이만하면 잘 배우고 있는 거지? 언젠가는 나도 내 땅에다가 먹을거리를 기를 수 있는 자신감과 실력을 가지게 되려나. 세계를 보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려나. 수업 중에 선생님이 농부는 땅(장소)과 때(시간)에 종속되지만, 자기 자신의 노동과 삶에 대해서는 자유롭다라고 하는 글을 소개해주셨어. 자연적인 시간과 공간에 따르지만 한 존재로서는 자유롭게, 그렇게 살고 싶어. 엄마가 해왔던 것처럼 많은 것들을 버리는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조금씩 내가 원하는 걸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엄마, 아프지 말고 건강해. 4월 달에는 꼭 집에 한 번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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