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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풀무에서 보내는 편지

[풀무에서 보내는 편지]네 번째. 아빠께

by 농민, 들 2014. 4. 21.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환경농업 전공부에 입학한 여연이가 겪고 느끼는 것을 편지에 담아 주변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20대 청년이 학교에서 생태농업과 공동체를 배워 나가는 과정을 소개합니다.[농저널 농담]

 

<농저널 농담> 여연

 

며칠 전에 오랜만에 전화로 아빠 목소리를 들었어요. 거의 한 달 만의 통화였어요. 그런데 하필 제가 어딘가로 가는 도중이어서, 혼란스런 안부전화로 짤막하게 끝나고 말았죠. 많이 아쉬웠어요. 아빠는 강의를 하셔야 하고 전 핸드폰을 잘 안 들고 다니니, 언제쯤 다시 서로 시간을 맞춰 통화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전화를 끊기 전에 아빠는 역시나 제게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어보셨어요. 저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지만 이런저런 것들을 읽고 있다, 라고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고요. 아빠는 가장 중요한 건 역사공부야라고 말씀하시면서 언제나처럼,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하셨죠.

 

열심히 공부하라, 저는 가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헷갈려요. 아빠가 늘 말씀하시는 열심히 공부하라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라는 뜻일까요? 아니, 써놓고 보니 그 질문들은 제가 저 자신에게 궁금한 것들이고, 아빠께 여쭤보고 싶은 질문은 이런 거예요. “여기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제가 배우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전공부는 농사를 배우는 학교이다, 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전혀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다른 일을 하시는 아빠 앞에서 농사의 자를 꺼내기조차 조금 어색해서 공동체 학교에요.” “대안 대학이에요.”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있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제가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일을 하며 살지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워요.

 

그래서 이 편지에서는 수업에 대한 이야기, 더 세밀하게는 학교에서 제가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풀무학교 전공부의 수업 방식은 제도권 안팎에 있는 다른 대학들과 많이 달라요.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농사 실습을 하는 방식이에요. 하루에 두 과목씩, 각 과목마다 1시간 20분 동안 수업을 듣는 거예요. 일주일을 다 합쳐도 수업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한창 바쁜 모내기철과 수확 철에 실습 기간이 시작되면 수업은 다 휴강을 해버려요.

 

 

느긋한 일요일 오전, 싹을 트우기 위해 물에 담궈놓은 볍씨 주변을 거니는 고양이 ⓒ 여연

 

 

과목들 이름도 대체로 농사와 관련된 것들이라, 다른 곳에는 없는 것들이에요. 월요일에는 <학급활동><재배계획>, 화요일에는 <논농사><농부와 인문>, 수요일에는 <, 노래, 상상력><농업과 기술>, 목요일에는 <인권과 자치><농부와 고전>, 금요일에는 <밭농사><자연과학>수업을 들어요.

 

하루에 세 시간 남짓한 수업시간이 저에게는 정말 소중해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애정이 가는 수업들이 몇몇 있어요. <재배계획><밭농사>가 그중 하나인데, 뒤가 헝클어진 짧은 머리에 키가 작고, 항상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여자선생님이 진행을 하시는 수업이에요. 선생님은 식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고, 항상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학생들이 묻는 질문에는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시는 그런 분이에요. 학생들 사이에서 워낙 인기가 많아서, 수업시간은 언제나 웃음과 농담이 끊이질 않아요.

 

이 수업들에서 좋은 점은, 배운 것들을 거의 다 직접 해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선생님이 식물들에게는 컴프리 잎이 종합영양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 잎을 액비(액체 형태의 비료)로 만들어서 뿌리면 좋아요.”라고 말씀하시면, 당장 그날이라도 컴프리 잎을 따다가 물에 섞어서 비료를 만들어 볼 수 있어요. 실험실은 각자가 맡은 텃밭이고요.

 

 

개나리 밑에 누워있는 고양이 ⓒ 전수주

 

화요일 수업들도 제가 무척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논농사>수업은 거의 전공부와 혼연일체라고 할 수 있을 남자 선생님이 진행하시는데, 체구도 작으신 분이 학교 일, 지역 일, 집안의 농사일 등등을 정신없이 하시면서도 학생들 각자의 이야기를 언제나 호기심을 가지고 귀담아 들으세요.

 

재밌는 건 수업 이름이 <논농사>인데도 선생님은 논농사와 관련된 것들은 한 이십분 만에 후다닥 끝내버리고(어차피 실습시간에 여러 번 반복해서 다시 배울 거니까요) 나머지 한 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녹색평론에 실렸던 글들이나 이반 일리치라는 사상가의 글, 신동엽 시인의 시 등등을 읽어주신다는 거예요. 논농사아닌 교양농사시간이 저는 워낙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업을 들어요.

 

<농부와 인문>시간에는 학생들 각자가 쓴 생활글을 읽고, 소감을 나눠요. 생활글을 편집해서 인쇄하는 일을 제가 맡았는데, 동기들을 채근해서 글을 받고, 편집하면서 읽는 과정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글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이랄까요. 그간 제 글에 대해서도, 남의 글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판단해왔던 저인데, 동기들의 생활글은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으니까요. 글이 그 사람으로 보이고, 글에 그대로(때로는 맞춤법이 틀리면서) 녹아있는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굳이 판단하지 않게 돼요.

 

목요일 수업인 <인권과 자치>는 외부에서 선생님이 오셔서 강의를 하시고, 금요일의 <자연과학>수업은 지역 도서관인 밝맑도서관에서 공개강좌 형태로 진행돼요. 둘 다 제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분야라서 짤막하게 언급된 개념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어요. 더 알고 싶은데, 수업은 너무 짧고 따로 공부할 시간과 집중력이 부족해서 아쉬울 때도 많아요.

 

저는 이런 수업들을 듣고 있어요. 여기까지 읽고 혹시 그것도 대학이냐?’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빠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들을 하시니까 대학에서의 배움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깊게 고민하셨을 거예요. 이 수업들에 대해서 아빠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요.

 

 

사실 전공부에서 배우는 것들만으로 제가 원하는 것들에 대해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식보다는 삶과 농사, 공동체와 동료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수업들이 많아요. 지금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수업이 없다는 점과 한국사 수업이 작년까지 있다가 올해 없어졌다는 점이에요.

 

특히 학교 도서관에 책이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쉬워요. 물론 신중하게 고르면 지금 있는 책들만으로도 2년 동안 읽기에는 충분하겠지만, ‘대학도서관에 대해서 제가 가지고 있던 약간의 환상(그중 많은 부분은 아빠가 심어주신 거예요)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학기가 처음 시작됐을 때는 자꾸만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서 두려웠어요. 지금도 가끔은 책을 읽거나,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단 생각에 한숨을 내쉬게 될 때가 있어요. 수업과 실습 일정이 빡빡해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힘든 마음이 더 강하게 들어요.

 

여기로 오기로 한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배워야 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데. 텃밭보다는 인간을 이해하고, 볍씨의 구조보다는 사회를 이해하고, 작물공부를 할 시간에 문화를 향유해야 하지 않을까?

 

 

기숙사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여연

 

그럴 때는 숨을 한 번 깊게 내쉬고, 창틀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봐요. 기숙사 주변에는 꽃잎이 갈색으로 변해 떨어져가는 목련나무와 초록빛 새싹이 한창 돋아나고 있는 개나리 덤불, 동료가 가꾸고 있는 텃밭이 있어요. 그 모든 걸 잠시 응시하고 있으면 금세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제 안에 다른 어떤 때보다 활기차고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 차요.

 

아빠, 전 지금처럼 많이 웃어본 적이 없어요. 지금처럼 매 순간 집중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처럼 내 자신이 어딘가에 속해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지금처럼 머리와 손과 몸이 일치하는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처럼 손 글씨를 많이 써본 적이 없어요.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지금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없는 것들과 부족한 것들에 대해서 불평하고,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신중하게 살피기란, 언뜻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전공부에 있는 건 무엇보다 평화롭고 고고하게 흘러가는 신념이에요. 소규모로 농사지어서 자기가 먹을 것을 기르는 농부의 삶에 대한 신념, 에너지는 순환해야 한다는 신념, 공동체와 마을은 안에서부터 단단해야 한다는 신념, 나를 알고 세상을 아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신념. 학교 안을 흐르는 그 강 같은 신념 아래에서 저는 일상을 살아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학생들의 젊음과,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과, 매일매일 조금씩 변하는 계절의 흐름과, 종일 명상할 수 있는 말들과, 밤늦게까지 읽고 싶은 책과, 함께 일하는 동료애와, 관찰할 수 있는 동식물들이 있어요.

 

이런 배움에 대해서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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