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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촌스러운 여행

[촌스러운 여행] 존 & 진 (9)

by 촌년 2014. 7. 3.

<농저널 농담> 박은빈


존 & 진


일주일에 단 두 대의 버스만 다니는 시골마을. 꼬불꼬불 언덕 따라 올라가 우리들의 아홉 번째 집에 도착했다. 발랄한 백발머리를 꽁지처럼 묶은 할머니 진이 우릴 반겨주었다. 그 옆에 회색빛 수염을 단 할아버지는 잡지 맨 뒷면에 있는 스도쿠를 맞추다 우릴 보고 서둘러 일어나셨다. 

이제 막 한 두 살 되어 보이는 나무묘목들이 집밖을 빙 두르고 있다. 그중에는 간혹 장미와 철쭉이 보이기도 한다. 존 할아버지의 묵직하고도 단정한 발자국을 따라 주변을 산책했다. 발 딛고 있는 언덕이 아래로 낮아지고 다시 높아지는 다음 언덕까지 하얀 양들이 작은 점처럼 박혀있다. 스무 해 전만해도 목장이었던 존과 진의 들판에는 대신 제각기 나이든 나무들이 이파리를 흔들고 있다. 

점심시간, 식탁이 단출하다. 직접 구운 빵과 버터, 작년에 만들어 놓은 토마토 처트니, 밭에서 따온 상추와 허브로 버무린 샐러드로 요기를 한다. 부엌은 언제나 진의 차지다.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한참 요리책을 들춰보더니 밭에서 한 꾸러미 채소를 수확해온다. 배추, 근대와 같은 푸성귀들을 푹 찐 반찬은 김치처럼 때마다 보인다. 먹는 건 최소한 간단히, 최대한 직접 기른 걸로 요리하자는 주의다. 헬렌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텃밭을 알뜰히 가꿔야 저녁식탁이 풍성해진다. 진을 닮아 조그마한 비닐하우스에는 두 사람이 먹을 만치 여러 종류의 채소들이 알록달록 정갈하게 자라고 있다. 하지만 한때 목장이었던 들판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꽃밭도 풀밭에 가깝다. 의아스럽다는 내 눈빛을 눈치 채었는지 “나에겐 텃밭이 가장 1순위야. 먹을 걸 기르는 게 더 중요해. 그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꽃도 보고, 연못도 관리할 텐데 그러기엔 텃밭 일이 너무 많아.”진이 말한다. 


1968년 존과 진이 살기 이전의 풍경이다.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이다.

그 옛날엔 맨 왼쪽 굴뚝 달린 집에서 13명의 대가족이 살았다고 한다. ⓒ박은빈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던 옛 모습과 달리 오늘 날 이곳은 숲으로 변했다. ⓒ박은빈


진은 스물여섯 내 나이 때 이미 세 아이를 가진 엄마였다. 젊은 시절 세계를 돌아다니며 광물을 캤던 존을 따라 진도 곳곳을 누비며 여행하듯 살았었다. 하지만 아이가 곧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다시 제 나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존은 영국에서 산다면 광업을 포기해야만 했고, 진은 아이와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우리 영국에 돌아가서 같이 농사지을까?”마침 집 앞에 텃밭 가꾸는데 푹 빠져있던 진의 제안에 둘은 농업이라는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되었다. 

한쪽에는 단조롭게 채소들이 자라고, 다른 쪽엔 되새김질하는 소들이 자유로이 흩어져 있었다. 소젖을 짜고 치즈를 만드는 일이 주요한 하루일과였다. 더 이상 세계를 여행할 수 없었지만, 학교 갔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과 시끌벅적한 저녁식사를 만끽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소밥을 챙기거나 밭에 잡초를 뽑거나 제 역할을 가졌다. 하루는 친구들과 같이 치즈를 만들며 놀고, 하루는 문을 제대로 걸어 잠그지 않아 소들이 집안에 들어오는 사고도 치고, 성인이 된 세 남매는 지금도 그 사건을 기억하며 킬킬 웃는다. 

모두 지나간 옛 이야기들이다. 어느새 존과 진은 손자손녀를 열 명이나 둔 노부부가 되었다. 존이 옛날에 치즈를 만들었던 공간이라며 어둑한 창고 문을 삐그덕 열었다. 서늘한 벽돌 옆에 먼지 내려앉은 치즈기계가 보인다. 존은 10년 간 10일도 쉬지 못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행에 목마르던 둘은 오래 전 목장 문을 닫고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돌아오는 7월에도 카라반을 끌고 프랑스로 떠날 예정이다.





촌 동네 놀 거리


이 동네에는 재미난 일들이 더러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북 클럽과 워크파티가 열려 이웃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이제 4년째 접어든 북 클럽은 하나 있던 게 두 개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저번 달에는 옆집 목장 아주머니가 종교에 대한 책을 선택하여 동네 무신론자며 기독교인이며 한집에 둘러앉아 주구장창 수다를 떨었다고 한다. 

이번 달 워크파티는 고맙게도 나를 기다려주었다. 차타고 언덕 넘어 이웃집에 닿았다. 집 앞 마당에 늘어져있는 삽자루, 전정가위, 목장갑, 포크들이 우릴 맞이했다. “어이! 왔어~!”우거진 수풀 사이로 사람들 목소리가 들린다. 먼저 도착한 아주머니 두 분이 가시덩굴을 자르고 있었다. 


수레를 들고 있는 진, 그 뒤에 삽질 중인 진의 친구들 ⓒ박은빈


이 모임은 35년 전 존과 진의 목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곳곳에 흩어져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을 함께해온 이웃들이다. 젊은 시절에 농사짓던 동네 친구들이 나이 들어가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다. 다들 머리가 희끗하나 일하는 몸짓과 표정은 청년 못지않다. “농사짓다보면 대부분 하루 종일 혼자 밭에 있을 때가 많아. 일이 고되기는 또 엄청 고되요. 그런데 이렇게 한 달에 딱 하루라도 다 같이 모여서 일하면 힘든지를 모르겠어. 조용했던 농장에 친구들이 모이니까 바글바글거리고 활기가 넘치잖아.”할머니 한 분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퇴비 실린 수레를 끌고 오르막길을 오르신다. 땀이 코끝을 간질이는지도 모르고 다시 빈 수레와 함께 퇴비더미 옆으로 내려오신다. 

영국에서도 이런 모임은 드문 일이다. 맨 처음 4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지금은 20명 정도 된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중에는 농사로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농사를 취미로 삼는 사람도 있다. 잠깐 쉬는 시간이 되자 농장 주인이 친구들을 데리고 한 바퀴 돌며 따끈따끈한 밭 소식을 전해준다. 타이어를 재활용하여 그 안에 작물을 심으니 사람 다니는 길과 구분되어 좋다는 팁도 나눈다. 아직 정리가 안 된 구역 앞에서는 더럽다고 꾸중도 듣는다. 그 모습마저 소풍 나온 아이들 같다. 마지막은 저녁만찬으로 장식된다. 일하는 내내 나눠도 모자란 이야기는 식탁에서도 이어진다. 



의자에 앉아 머리 허연 이 사람들을 쳐다보니 얄궂게도 교과서에서나 봤던 우리나라 두레가 떠오른다. 누군가 시골인심이 서울인심보다 못하다고 했던가. 어느새 부터인가 여럿이 일하는 모습은 농번기 때 농부가 할머니들 사다 쓸 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끝도 안 보이는 붉은 줄이랑 사이사이 수건 두른 할머니들이 계주선수처럼 보인다. 농익은 손길로 고랑 타는 솜씨는 아무나 따라갈 수 없다. 반면에 여느 날 홀로 굽은 허리 이끌고 밭에 계시는 어르신들을 마주친다. 어쩌면 작은 초가집에서도 홀로 개 한 마리 데리고 사실지 모른다. 아이들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건 여기나 저기나 매한가지지만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은 서로 엇갈린다. 그 사이에 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차분히 묻고 있다. 선명해질 때까지 이 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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