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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촌스러운 여행

[촌스러운 여행] 두 나라, 두 농부, 두 아내 (12)

by 촌년 2014. 10. 13.

Ashburton, Devon, England

연두색 화살표를 따라 촌스러운 여행의 목적지를 표시합니다.



두 나라, 두 농부, 두 아내

낮만 해도 해가 뜨거웠다. 날이 어스름해지더니 축축한 바람이 찾아오고 하나 둘 방울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빗소리 들으랴 턱을 괴고 활짝 열어둔 창문 너머를 감상한다. 실 같던 비가 금방 굵어졌다. 

멀리서 죤티가 헐레벌떡 장화로 갈아 신고 밭을 향해 뛰어간다. 뒤따라 죤티의 아들도 우비 단추를 채 다 잠그지 못하고 뛰어간다.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양들이 겨우내 먹을 풀을 베어 말린 게 밭에 그대로 있구나. 죤티는 며칠 간 마른 풀을 네모나게 묶어두느라 늦은 밤까지 바빴었다. 한 트럭이라도 비를 덜 맞히려고 저녁밥도 팽개쳐놓고 뛰어나간 두 사람. 아빠도 남일 같지 않다며 그 둘을 따라 나섰다. 한 명은 커다란 트럭을 운전하고, 한 명은 들판의 건초들을 트럭 뒤 칸으로 던지고, 나머지 한 명은 트럭 뒤 칸에서 차곡차곡 쌓아 날랐다. 


ⓒ박은빈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어둑해져서야 온몸이 흠뻑 젖은 세 사람이 돌아왔다. 그 꼴을 맞닥뜨린 두 나라 아내. 엄마는 아빠에게, 카롤은 존티에게 한 목소리를 낸다.  “아유 어떡해. 얼른 옷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면 어떡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저녁상을 다시 차리러 부엌으로 향한다. 두 나라 농부는 옷 갈아입을 생각이 없고  “아직 밭에 건초가 몇 트럭 더 남아있는데. 어서 비가 그쳐야 할 텐데.” 창밖에 부서지는 비를 애석하게 쳐다본다. 

작년 겨울 우리 집 앞 1500평이 넘는 밭에는 검은콩이 다 익어 바싹 마른 껍질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빠는 한창 김장 시즌에 배추 수확하고, 절이고, 택배 보내느라 시린 두 손을 녹일 시간도 없었다. 그저 눈이 하루라도 늦게 내리길 바라고 바랐다. 사람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농사라고, 눈은 기어코 콩밭에 내려앉아 하얀 눈밭을 만들어주었다. 

다음 날 쨍쨍한 낮볕에 조금 녹은 눈 사이를 비집고 콩 수확작업을 시작했다. 매서운 강원도 산골짜기 겨울바람은 미처 녹이지 못한 시린 손을 할퀴었다. 

매해 검은 콩을 수확하고 그 중에 가장 잘생긴 녀석으로다가 다음 해를 위해 씨앗으로 골라내던 아빠의 손길이 선하다. 푸른 잎을 흔들어대던 지난여름 날의 콩밭도 기억한다. 하지만 눈 덮인 마른 흙빛의 콩 꼬투리는 아빠 마음만큼이나 허탈해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두 나라 농부는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음 날 해가 뜨길 기다리고, 몇 십 년 매일을 그래왔듯 다시 밭으로 걸어가는 것.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

흔들거리는 눈동자, 움츠린 어깨, 낯선 사람들 속에서 최대한 자신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는 듯 몸짓을 아낀다. 알레나는 허스벤더리 학교(Husbandry School)에 오는 여학생이다. 먼 한국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갑작스레 같은 식탁에 둘러앉게 되어 적잖이 당황한듯하다. 카롤은 정적을 깨고 알레나에게 우리들을 소개해주었다. “알레나, 주대(아빠를 가리킴)는 한국에서 농사짓는 농부야.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집도 지었어. 나중에 같이 사진 보자. 그건 정말 꼭 봐야 돼~”“아! 맞다! 빈!(나를 가리킴) 점심 먹고 피아노 쳐줄 수 있어!? 알레나도 피아노 치는 걸 엄청 좋아하는데, 아마 네 피아노 소리 들으면 엄청 좋아할 거야.”

카롤의 말대로 알레나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내 옆으로 왔다. 내 곡이 끝나자 말 없던 알레나가 입을 열었다. “나도 한 번 쳐봐도 돼?” “혹시 이 노래 알아? 이거 요즘 연습하는 건데.” 연주하는 알레나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을 오갔다. 

알레나는 보통 다른 또래 친구들과 달리 학교에 가지 않는다.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거나 어떠한 무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튕겨져 나왔거나. 대신 동네 언덕 위에 있는 이곳 허스벤더리 학교에 찾아온다. 


언덕까지 올라오는 길은 꽃밭인지 채소밭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색의 꽃과 이파리, 열매가 흐드러져 누구든 그 자리에 잠깐이라도 서있게 만든다. 카롤과 죤티는 7년 전부터 이곳을 가꾸어왔다. 아이들이 찾아오는 농장이자 자연을 배우는 학교. 줄곧 그들이 꿈꿔왔던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농사를 졌던 죤티는 옛날부터 커다란 고민을 갖고 있었다. 한 때 대규모의 목장을 했던 죤티는 살아있는 것을 다룸에도 공장처럼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에 한계를 느꼈다. 농부 자신도 토양도 자연도 모두 척박해지고 지쳐버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농촌에 아이들은 지역을 떠나고 싶어 하고, 아무도 농사를 짓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절망스러웠다. 

비슷한 시기에 죤티의 파트너 카롤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오랫동안 특수학급 교사로 일했던 카롤은 지역에 장애아동을 포함하여 탈학교 청소년들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았다. 대부분 집에서조차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는 걸 가까이서 봐왔기에 함께할 무언가를 늘 바라왔다.

또 다른 농업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죤티와 지역의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던 카롤. 중년의 두 사람은 허스벤더리 학교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박은빈


죤티가 양을 돌보러 들판으로 나갈 즈음, 카롤은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 맞이에 분주하다. 하나 둘 친구들이 언덕길을 올라온다. 어떤 친구는 꽃밭을 바라보고 앉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린다. 어떤 친구들은 죤티를 따라가 양 한 마리 한 마리 건강이 어떤지 살핀다. 누구는 다음 계절에 아름답게 피어날 꽃을 심는다. 잡초도 뽑고, 낮잠도 자고. 카롤과 갓 따온 허브로 쿠키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보통 학교라 하면 수업이 있고 교실 안에 학생이 있기 마련인데, 여긴 애들 오는 시간도 띄엄띄엄. 하는 것도 제각각. 카롤은 설득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 

“애들마다 호흡이 다 달라. 여기 온 지 1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밭에 얼씬도 않던 한 친구가 있어. 근데 요즘 그 친구가 나한테 뭘 물어보는 지 알아? 밭에 있는 꽃 이름들을 묻기 시작한 거 있지! 밭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어. 예전엔 꽃 같은 거 도대체 왜 기르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녀석이었는데..” 카롤의 말에 내가 더 흐뭇해진다. 

하루는 죤티와 같이 농장 전체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겨울, 양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기른 풀들은 이미 언덕 능선을 따라 베어져 있었다. 

내가 어떤 풀들이 심겨졌는지 궁금해서 묻자 동행하던 한 남학생이 땅에 흩어져있는 풀을 집어 들며. “양들이 좋아하는 풀 종류가 따로 있어요. 여기엔 12가지 종류의 풀이 심겨져 있고, 이건 귀리에요.” 라고 죤티 대신 대답해주었다. 남학생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죤티, 이 정도면 풀이 거의 다 말랐네요? 수분이 00퍼센트(정확한 숫자를 말했으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포함되어있을 때 압축해서 보관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잖아요.” 죤티가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그 친구를 쳐다봤다. “너 어떻게 그걸 알아?” “예전에 빌려줬던 책에서 읽었어요.” 그 남학생은 두텁게 뭉쳐있는 풀 더미를 발로 헤집으며 “이거 군데군데 뭉쳐져 있어서 잘 안 마르겠어요. 걸어가는 김에 다들 같이 넓게 펴 널어요.”또 한 번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불타오르는 지옥에 커다란 해골이 새겨져있는 검은 티셔츠, 반짝이는 찡이 여러 개 박힌 검은 배기팬츠, 양쪽 귀에 엄지손가락이 들랑날랑할 만큼 커다란 구멍의 피어싱을 한 그 학생이 평생 양을 키운 죤티만큼이나 양을 예뻐할 줄이야. 


허스벤더리 학교에서 가장 중요히 여기는 시간은 점심시간이다. 처음에 집을 지을 때에도 부엌을 집 한 가운데에 둥그렇게 위치하도록 했다. 식탁은 그 가운데에서도 중심에 있다. “대부분 이곳에 오는 친구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둘러앉아 밥을 먹어본 경험이 없어.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야. 처음엔 다들 다른 음식들 놔두고 바로 앞에 있는 빵 쪼가리 조금 뜯어다 먹고 말아. 그게 익숙하니까.” 카롤이 점심을 차리며 이야기한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애들한테, 이렇게 모여서 맛있는 밥 한 끼 즐겁게 먹는 기억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어.” 카롤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식탁 가득 바게트, 고소한 씨앗이 박힌 식빵, 버터,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 아빠가 좋아하는 포도, 밭에서 따온 샐러드, 여러 종류의 소스, 요거트, 갓 구운 컵 케익이 놓였다. 이제 즐거운 대화만 얹으면!

점심을 먹다가 친구들은 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 이제 로라 아기 낳을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오! 벌써!? 그날이 정확히 언제였더라?” “잠깐만 기다려봐, 나 날짜 계산한 거 적어놨었어.” 한 친구가 후다닥 노트를 가지러 뛰어간다. 로라는 양 이름이다. 가져온 노트를 펼치고 로라가 출산하는 날 뿐만 아니라 다른 양들도 언제 새끼를 낳는 지 몸 상태가 어떤지 줄줄 읊는다. 오랫동안 양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걸 지켜봐온 친구들에게는 특별한 소식이다. 


ⓒ박은빈


카롤과 죤티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 외에도 농장을 가꾸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직접 기른 작물들로 허브차, 식초, 잼, 처트니, 피클을 만드는 건 기본. 68가지가 넘는 형형색색 허브와 식용꽃이 담긴 샐러드 백은 지역에서도 유명하다. 

인근 요리전문학교에서는 요리 재료들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수업을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또한 이곳에서 난 재료로 요리수업을 한다. 그밖에 아스파라거스, 케일, 감자, 당근, 애호박 등등의 야채들을 꾸러미처럼 묶어 이웃과 소규모로 직거래한다. 게다가 47에이커가 넘는 널따란 들판에 평화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200여 마리의 양들도 있다. 양치기 개와 염소, 소, 돼지, 닭도 있어 없는 게 없는 농장이다. 

하지만 카롤은 농장에서 난 농산물과 가공품을 판매하는 규모를 더 늘릴 계획은 없다. “하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몇 배로 생산해서 팔수도 있어. 저기 저 잼도 하루 종일 만들고, 샐러드도 하루 종일 수확할 수도 있어. 근데, 그러면 애들 만날 시간이 없어져. 나에겐 아이들 만나는 시간이 더 중요해.”

친구들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사람들에게 품던 긴장도 스르륵 풀어놓는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다음 날 언제라도 언덕 위 밭에서 카롤과 죤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드디어 만났다! 

분홍빛 구름이 연한 파란 하늘에 퍼져있다. 선선한 바람이 언덕타고 올라오는 걸 느끼며 노란 노을이 뒤덮인 아름다운 밭을 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에게 내일 보자고 인사하는 죤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린다.

식탁에 남아있는 복숭아 한 입 베어 물고 혼자 생각에 빠졌다. 한 번쯤 상상해본 꿈들은 지구 어디에선가 실제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 정말이었구나. 카롤과 죤티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들이 꼭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시골 마을 아름다운 밭에서 동네 아이들을 만나는 건 당연하거니와 일상적인 작업 공간들마저도. 

밭에서 수확해온 작물들을 두 손 무겁게 들고 앞마당에 풀어놓으면, 팔 수 있도록 포장할 차례다. 대충 넓은 비닐 덮개를 바닥에 깔고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를 드르륵 끌고 온다. 그 다음 필요한 포장지, 가위, 팬 등등을 찾느라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린다. 작물을 손질하다가 보니 박스를 덜 가져와서 또 가지러 안에 들어갔다 나오길 몇 번. 현명한 농부는 이렇게 일하지 않는다. 


ⓒ박은빈


카롤과 죤티의 작업실은 일이 막힘없이 흘러가도록 모든 필요가 일의 동선대로 준비되어 있다. 갖가지 화분과 트레이들이 크기별로 정리된 선반, 그 아래 씨앗을 심는 책상은 마치 주부들이 요리하고 설거지하기 편리하도록 설치된 싱크대처럼 쓰임새별로 나뉘어 있다. 

포장하는 작업실에는 작물별로 필요한 포장지가 각각 나무 서랍 안에 차곡차곡 놓여있고, 계란수확을 위한 바구니에는 깨지지 않도록 지푸라기가, 꽃이나 허브를 수확하는 바구니에는 종류별로 구분할 수 있는 통이 들어있다. 누구든지 작업실에 오면 어떤 순서로 어떻게 일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친절한 설명과 작업일지도 적혀있다. 

사방이 꽉 막힌 벽에 백열전구 하나 켜놓고 창고에서 일하면 곧 마음마저 칙칙해진다. 여기 작업실은 즐거움까지 겸비했다. 오늘 하늘은 어떤지, 색색의 꽃과 채소들을 바라보며 일을 할 수 있도록 커다란 창문이 밭을 향해 열려있다. 

요리사에게 부엌이, 목수에게 목공실이, 사진작가에게 스튜디오가 있듯 농부에게도 작업실이 있다. 카롤과 죤티가 꾸며놓은 공간들은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작업을 사랑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알게 해준다. 


나는 제비꽃이 보라색만 있는 줄 알았다. 콘플라워도 파랑색, 흰색만 봐왔다. 그런데 여기선 꽃 별로 그 수를 샐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것 아닌가! 카롤과 죤티가 그동안 농사지으며 적은 기록들도 놀랍다. 이곳의 역사, 작물별 특징, 농사방법 등 주제별로 꼼꼼하게 정리되어 언제든지 누구라도 공유할 수 있다. 

이 작은 사실 하나 하나가 모여 내게 영감이 된다. 10년 후 내가 가꾸고 있을 밭에도 수많은 꽃과 작물들이 어우러져 있을 것이다. 계획하고 틀 만들기 좋아하는 내가 그때 되면 ‘틀 없는’허스벤더리 학교처럼 동네아이들과 자유로이 만나길 꿈꾼다. 서재에 꽂혀있던 책들 중 밭 디자인과 색에 대한 재밌는 책을 읽다 오늘 저녁도 꿈과 함께 잠이 든다. 


ⓒ박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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