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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농촌페미니즘

[친구에게] 진안 이든농장 이슬에게서

by 농민, 들 2017. 6. 21.

혼자 상상만 해온 일을 실천해보고 싶은 마음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열린 청년여성농민 캠프 우리끼리 좋아서 하룻밤’. 2017년 아직 농사가 시작되기 전이던 3월 어느 날청년여성농민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열 명의 농민농업활동가농촌생활자가 모였습니다

첫 번째 캠프 이야기 > http://j-nongdam.tistory.com/96


1박 2일을 함께 보낸 열 명의 청년여성농민들은 헤어지기 전릴레이 편지를 쓸 것을 약속했습니다삶을 공유하는 일을 지속하자는 약속이었습니다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간 청년여성농민들은 논밭에서집에서사무실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그러다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고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씁니다. [농저널 농담]




진안 이든농장 이슬이에게서

 

볕이 뜨거운 한 낮에 답장을 써요.

해원의 소식을 받고 보니 10, 20평 논농사, 목화 농사도 아이들도 모두 오부락지더라구요아내로, 엄마로, 또 해원으로 바쁜 와중에도 해원다움이 가득한 일상이 내 눈엔 마냥 대단해 보였어요. :-) 아 울림이 이음이가 밭에서 홀딱 벗은 사진을 보고는 한참 웃었네요밭에서 일하는 해원과 곁에서 잘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어릴 적 할매랑 밭에 있던 시절이 떠오르고 결혼도 아이도 아직 멀게 느껴지지만 나 역시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 같은 것들을 하게 되더라고요.(결론은 역시 멋져요. 해원 :-))



ⓒ이슬

4월 중 한창 자라는 중인 모종들


저는 유난히 늦은 올해의 농사일을 허둥지둥 하며 지내고 있어요5년째 농사짓는다고 집에 와 있는데 실상은 매년 처음 하는 것 같고,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예년과 다르게 올 해는 방황 끝에 2월에 넣을 가지와 토마토 씨를 4월에서야 넣었으니 뭐, 말다했지요.

 

한 해 한 해 경험을 더해가며 그제야 제 것으로 배우는 것들이 몇 가지 있어요말로는 이론으로는 알아도 아직 소화가 덜 되던 것들을 부딪치고 경험하고서야 아! 하고 내 것이 되는 실패를(배움을) 거듭하고 있답니다.

 

요즘 깨닫는 것 중에 하나는 다 때 가 있다.” 는 거예요뭐 당연히 막연하게 그래 다 그시기에 맞는 일이 있지. 하면서도 책에서 본 대로,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심으란 때에 심고 거두면 그저 잘 자라는 것 같고, 할매가 꽃대 나와서 못쓴다고 할 때를 노려 심어야 씨앗을 맺으니, 청개구리처럼 때를 달리하여 일을 벌이기도 하다 보니, 딴에는 일단 심으면 얘들도 살고 싶으니 어떻게든 자라는구먼?!’ 하고 자만하고 있었거든요.



이슬

꽃대 올라와서 못쓴다는 적양배추를 부득부득 우겨가며 못 뽑으시게 하는 중. 보라색과 노란색이 이리 잘 어울리는지 몰랐었다.



올해 부쩍 늦은 씨 넣기를 하고 일이 밀려 모종을 제 때에 옮겨 심지 못해 늦게나마 옮겨 심었더니 같은 날 씨 넣은 모종인데도 천지차이에요적기에 옮겨 심은 아이들은 며칠 새 땅 맛을 알아 지금은 늠름한 자태를 뽐내지만, 때를 놓친 아이들은 땅 맛을 알기는커녕 이제나 저제나 물 한번 주지 못하면 곧 쓰러질 기세랍니다.



이슬

왼쪽 늦게 심은 양상추-오른쪽 제때 심은 양상추



라는 것이 정해진 시간표가 없이 식물의 시간, 자연의 시간이 각각 자기대로 흘러버려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러 번 경험하며 (실패와 성공의 무한 반복을 하고) 부지런히 때를 알고, 흐름에 맞게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부끄럽게도 이제 사 알아가는 중이에요.


때를 아는 것처럼 깨닫는 것은 땅 맛에 관한 거예요.(제 때에 심어야 땅 맛이 드는 잘 드는 걸 보면서)



이슬

할머니가 물려주신 호미


올 해는 할머니가 날이 닳아 작아진 호미하나를 물려 주셨어요요놈이 땅 탐이 있어, 이놈으로 혀” 땅 탐은 사실 말로 표현하긴 애매하고 손 맛인 것 같아요호미가 아는 땅 맛 같아요땅 탐 있는 호미로 밭을 메 보면 즉각 아~! 하고 알게 되거든요장에 가서 매년 호미를 사오면 사오는 족족 할매는 무겁다, 땅 탐이 없다, 못 쓰것다 등등 퇴짜를 놓곤 하시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죠. 일을 하다보면 호미는 꽃삽대신 모종과 씨앗을 심는 일부터, 삽과 괭이 대신 밭두둑을 만드는 일, 밭을 매는 일, 땅속 작물을 수확하는 일 까지 호미하나와 두 손이면 거의 모든 일을 하게 되요. 그만큼 땅 탐 있는 호미 하나가 일을 몇 배는 수월하게 하는지 몰라요그런 면에서 더욱 호미의 땅 탐은 작물의 땅 맛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슬

부쩍 땅 맛이 들어 썽썽해진 아이들



이슬

색색깔의 근대와 솎아먹는 래디쉬. 땅 맛이 맛있게 들었다.



요즘은 땅 탐, 땅 맛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옮겨 심은 모종이 곧 죽을 듯 시들시들하다가도 며칠이 지나지 시들은 잎은 떨어질지언정, 나중에는 물 한 모금 없이도 썽썽해 지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인자 자는 땅 맛 들었으니 됐다.’ 고 하시거든요.

 

이론적으로야 식물이 제힘으로 광합성을 하고 뿌리가 잘 활착되었다 정도로 풀 수 있겠지만, 그 표현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땅 맛이란 표현에는 있어요식물이 이제야 땅의 맛을 알아서 잘 자란다는 말은 뭐랄까, 다르게 보면 어떤 음식을 잘 먹을 줄 모르던 사람이 맛을 알고 나니 무지하게 잘 먹는다 같은 모습인데... 다르게 생각 하면 땅 맛이라는 표현은 결국 그 작물의 맛땅의 맛이라는 생각도 들어요생각할수록 맛있는 표현이에요땅이 맛있어야, 땅 맛이 들어야, 작물은 잘 자라고 제 맛이 드는 거죠.

 

땅 맛 드는 놈, 땅 맛 안든 놈 사이에서 김을 매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해요나는 땅 맛이 들었나 안 들었나. '나는 지금 어떤 때를 지나고 있나' 하는 생각이요사람도 땅 맛이 드는 거 같아요예를 들어 똑같은 씨앗을 할머니는 벅벅 호미를 긁듯이 밭에 뿌리시고, 저는 애지중지 모종판에 하나씩 넣고 가꿨는데 결론은 할머니가 뿌린 놈이 더 잘 자란다는 거예요씨앗도 아는 것 같아요. 사람 손 맛, 그리고 그 손에 베인 땅 맛을할머니랑 비교하는 건 너무 참새 가랑이 찢어질 일이니 접어두고사람도 땅 맛이 들면 일이 절로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농사일이 몸에 배고 때에 따라 일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것흙을 일구는 것의 맛을 아는 것 같은 거요.



이슬

작년에 실패한 커다란 정원같은 텃밭을 올 해 다시 만들어 나가고 있다.


매일, 매년 사실 실험에 가까운 도전들뿐이고 실패 투성이에 이제는 부쩍 겁이 늘어 움츠러드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는 안즉 땅 맛 들라면 멀었구나 생각해요

 

24시간 입을 안 닫아서 편의점 같다는 별명에 걸맞게 글이 길어졌어요. 거기다 그다지 즐겁지도 않은 주제로올해 벌인 일들,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소개할까 했었는데 아무래도 잘 안 써지더라고요그냥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지내는 중이에요.

 

아, 5년째가 되면서 달라진 건 늘 죽자 살자 선크림 바르고 모자에 손수건 까지 두르고 아무리 더워도 긴팔 긴바지를 고수하다, 올해 유난히 더운 봄을 나면서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벗어던졌더니 다른 인형의 팔을 조립해놓은 것처럼 판과 뒷목 귀가 새까매졌어요늘 농사짓는 사람 맞느냐, 왜 피부가 하야냐고 듣던 말들이 쏙 들어가게 끔요가끔 적응이 안 되긴 하지만, 하얀 살결이 과연 뭣 때문에 그리 중요했었나 싶어요.

 

하이고 만난 지 석 달이나 지났으니 할 말이 오죽 많겠습니까마는 이만 접을 랍니다더 가벼운 이야기들, 더 무거운 이야기들 한 짐 싣고 만나면 좋겠네요그냥 청년 농부들의 미래 뭐 이런 어려운 주제보다 이런 생각해’, ‘이렇게 살아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돼요.

 

그날 밤 밤늦도록 편의점 얘기 듣느라 곤 했을 연두의 소식이 궁금해요울림이 이음이를 보니 귀여운 지이 소식도 궁금하구요 :-) 특히나 강원도에는 달래, 연근과 함께 일하니 얼마나 즐거울꼬! 늘 부러움과 궁금한 곳이기도 해요.

 

, 반송 끝에 도착했을 우리 아이들(씨앗)은 잘 자라고 있나요? 

 

-2017612일 진안 이든농장에서 이슬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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