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상상만 해온 일을 실천해보고 싶은 마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열린 청년여성농민 캠프 ‘우리끼리 좋아서 하룻밤’. 2017년 아직 농사가 시작되기 전이던 3월 어느 날, 청년여성농민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열 명의 농민, 농업활동가, 농촌생활자가 모였습니다.
첫 번째 캠프 이야기 > http://j-nongdam.tistory.com/96
1박 2일을 함께 보낸 열 명의 청년여성농민들은 헤어지기 전, 릴레이 편지를 쓸 것을 약속했습니다. 삶을 공유하는 일을 지속하자는 약속이었습니다.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간 청년여성농민들은 논밭에서, 집에서, 사무실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고, 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씁니다. [농저널 농담]
진안 이든농장 이슬이에게서
볕이 뜨거운 한 낮에 답장을 써요.
해원의 소식을 받고 보니 10평, 20평 논농사, 목화 농사도 아이들도 모두 오부락지더라구요. 아내로, 엄마로, 또 해원으로 바쁜 와중에도 해원다움이 가득한 일상이 내 눈엔 마냥 대단해 보였어요. :-) 아 울림이 이음이가 밭에서 홀딱 벗은 사진을 보고는 한참 웃었네요. 밭에서 일하는 해원과 곁에서 잘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어릴 적 할매랑 밭에 있던 시절이 떠오르고 결혼도 아이도 아직 멀게 느껴지지만 나 역시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 같은 것들을 하게 되더라고요.(결론은 역시 멋져요. 해원 :-))
ⓒ이슬
4월 중 한창 자라는 중인 모종들
저는 유난히 늦은 올해의 농사일을 허둥지둥 하며 지내고 있어요. 5년째 농사짓는다고 집에 와 있는데 실상은 매년 처음 하는 것 같고,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예년과 다르게 올 해는 방황 끝에 2월에 넣을 가지와 토마토 씨를 4월에서야 넣었으니 뭐, 말다했지요.
한 해 한 해 경험을 더해가며 그제야 제 것으로 배우는 것들이 몇 가지 있어요. 말로는 이론으로는 알아도 아직 소화가 덜 되던 것들을 부딪치고 경험하고서야 아! 하고 내 것이 되는 실패를(배움을) 거듭하고 있답니다.
요즘 깨닫는 것 중에 하나는 “다 때 가 있다.” 는 거예요. 뭐 당연히 막연하게 그래 다 그시기에 맞는 일이 있지. 하면서도 책에서 본 대로,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심으란 때에 심고 거두면 그저 잘 자라는 것 같고, 할매가 꽃대 나와서 못쓴다고 할 때를 노려 심어야 씨앗을 맺으니, 청개구리처럼 때를 달리하여 일을 벌이기도 하다 보니, 딴에는 ‘일단 심으면 얘들도 살고 싶으니 어떻게든 자라는구먼?!’ 하고 자만하고 있었거든요.
ⓒ이슬
꽃대 올라와서 못쓴다는 적양배추를 부득부득 우겨가며 못 뽑으시게 하는 중. 보라색과 노란색이 이리 잘 어울리는지 몰랐었다.
올해 부쩍 늦은 씨 넣기를 하고 일이 밀려 모종을 제 때에 옮겨 심지 못해 늦게나마 옮겨 심었더니 같은 날 씨 넣은 모종인데도 천지차이에요. 적기에 옮겨 심은 아이들은 며칠 새 ‘땅 맛’을 알아 지금은 늠름한 자태를 뽐내지만, 때를 놓친 아이들은 ‘땅 맛’을 알기는커녕 이제나 저제나 물 한번 주지 못하면 곧 쓰러질 기세랍니다.
ⓒ이슬
왼쪽 늦게 심은 양상추-오른쪽 제때 심은 양상추
그 ‘때’라는 것이 정해진 시간표가 없이 식물의 시간, 자연의 시간이 각각 자기대로 흘러버려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러 번 경험하며 (실패와 성공의 무한 반복을 하고) 부지런히 때를 알고, 흐름에 맞게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부끄럽게도 이제 사 알아가는 중이에요.
때를 아는 것처럼 깨닫는 것은 땅 맛에 관한 거예요.(제 때에 심어야 땅 맛이 드는 잘 드는 걸 보면서)
ⓒ이슬
할머니가 물려주신 호미
올 해는 할머니가 날이 닳아 작아진 호미하나를 물려 주셨어요. “요놈이 땅 탐이 있어, 이놈으로 혀” 땅 탐은 사실 말로 표현하긴 애매하고 손 맛인 것 같아요. 호미가 아는 땅 맛 같아요. 땅 탐 있는 호미로 밭을 메 보면 즉각 아~! 하고 알게 되거든요. 장에 가서 매년 호미를 사오면 사오는 족족 할매는 무겁다, 땅 탐이 없다, 못 쓰것다 등등 퇴짜를 놓곤 하시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죠. 일을 하다보면 호미는 꽃삽대신 모종과 씨앗을 심는 일부터, 삽과 괭이 대신 밭두둑을 만드는 일, 밭을 매는 일, 땅속 작물을 수확하는 일 까지 호미하나와 두 손이면 거의 모든 일을 하게 되요. 그만큼 땅 탐 있는 호미 하나가 일을 몇 배는 수월하게 하는지 몰라요. 그런 면에서 더욱 호미의 땅 탐은 작물의 땅 맛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슬
부쩍 땅 맛이 들어 썽썽해진 아이들
ⓒ이슬
색색깔의 근대와 솎아먹는 래디쉬. 땅 맛이 맛있게 들었다.
요즘은 땅 탐, 땅 맛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옮겨 심은 모종이 곧 죽을 듯 시들시들하다가도 며칠이 지나지 시들은 잎은 떨어질지언정, 나중에는 물 한 모금 없이도 썽썽해 지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인자 자는 땅 맛 들었으니 됐다.’ 고 하시거든요.
이론적으로야 식물이 제힘으로 광합성을 하고 뿌리가 잘 활착되었다 정도로 풀 수 있겠지만, 그 표현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땅 맛’이란 표현에는 있어요. 식물이 이제야 땅의 맛을 알아서 잘 자란다는 말은 뭐랄까, 다르게 보면 어떤 음식을 잘 먹을 줄 모르던 사람이 맛을 알고 나니 무지하게 잘 먹는다 같은 모습인데... 다르게 생각 하면 땅 맛이라는 표현은 결국 그 ‘작물의 맛’은 ‘땅의 맛’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생각할수록 맛있는 표현이에요. 땅이 맛있어야, 땅 맛이 들어야, 작물은 잘 자라고 제 맛이 드는 거죠.
땅 맛 드는 놈, 땅 맛 안든 놈 사이에서 김을 매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땅 맛이 들었나 안 들었나. '나는 지금 어떤 때를 지나고 있나' 하는 생각이요. 사람도 땅 맛이 드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똑같은 씨앗을 할머니는 벅벅 호미를 긁듯이 밭에 뿌리시고, 저는 애지중지 모종판에 하나씩 넣고 가꿨는데 결론은 할머니가 뿌린 놈이 더 잘 자란다는 거예요. 씨앗도 아는 것 같아요. 사람 손 맛, 그리고 그 손에 베인 땅 맛을. 할머니랑 비교하는 건 너무 참새 가랑이 찢어질 일이니 접어두고. 사람도 땅 맛이 들면 일이 절로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사일이 몸에 배고 때에 따라 일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것. 흙을 일구는 것의 맛을 아는 것 같은 거요.
ⓒ이슬
작년에 실패한 커다란 정원같은 텃밭을 올 해 다시 만들어 나가고 있다.
매일, 매년 사실 실험에 가까운 도전들뿐이고 실패 투성이에 이제는 부쩍 겁이 늘어 움츠러드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는 안즉 땅 맛 들라면 멀었구나 생각해요.
24시간 입을 안 닫아서 편의점 같다는 별명에 걸맞게 글이 길어졌어요. 거기다 그다지 즐겁지도 않은 주제로. 올해 벌인 일들,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소개할까 했었는데 아무래도 잘 안 써지더라고요. 그냥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지내는 중이에요.
아, 5년째가 되면서 달라진 건 늘 죽자 살자 선크림 바르고 모자에 손수건 까지 두르고 아무리 더워도 긴팔 긴바지를 고수하다, 올해 유난히 더운 봄을 나면서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벗어던졌더니 다른 인형의 팔을 조립해놓은 것처럼 판과 뒷목 귀가 새까매졌어요. 늘 농사짓는 사람 맞느냐, 왜 피부가 하야냐고 듣던 말들이 쏙 들어가게 끔요. 가끔 적응이 안 되긴 하지만, 하얀 살결이 과연 뭣 때문에 그리 중요했었나 싶어요.
하이고 만난 지 석 달이나 지났으니 할 말이 오죽 많겠습니까마는 이만 접을 랍니다. 더 가벼운 이야기들, 더 무거운 이야기들 한 짐 싣고 만나면 좋겠네요. 그냥 청년 농부들의 미래 뭐 이런 어려운 주제보다 ‘이런 생각해’, ‘이렇게 살아’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돼요.
그날 밤 밤늦도록 편의점 얘기 듣느라 곤 했을 연두의 소식이 궁금해요. 울림이 이음이를 보니 귀여운 지이 소식도 궁금하구요 :-) 특히나 강원도에는 달래, 연근과 함께 일하니 얼마나 즐거울꼬! 늘 부러움과 궁금한 곳이기도 해요.
덧, 반송 끝에 도착했을 우리 아이들(씨앗)은 잘 자라고 있나요?
-2017년 6월 12일 진안 이든농장에서 이슬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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