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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촌스러운 여행

[촌스러운 여행] 촌스러운 가족, 촌스러운 여행 (2)

by 농민, 들 2014. 3. 19.

2014년 2월, 가족들과 유럽 시골마을로 일명 촌스러운 여행을 떠난 박은빈의 기록입니다. 박은빈과 그녀의 가족이 유럽여행 중 만나는 다양한 농촌과 농업 협태를 전합니다. 매달 첫째, 셋째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농저널 농담> 박은빈

 

 

출국

 

살아간다는 것은 자전거 타는 것과 같을까? 놀이동산에 있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을까? 자전거는 언덕을 오르고, 롤러코스터는 가파른 레일을 오르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굴곡을 지나간다. 내 두 발과 두 손으로 빠르기와 방향을 바꿀 수 있거나,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되기 어려운 손길로 인해 움직여질 수 있다.

농부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떠돌지 않고 머물겠다는 삶의 표현이다. 그런 내가 떠돌아야만 한다니. 모든 것을 내려두고 떠나야만 한다니. 물론 내가 선택한 여행이지만, 그동안 건너온 삶의 언덕을 돌아보며 선택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여행 후 나는 어떻게 살아가지? 다시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까?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서 뭘 하지? 어느 하나 정해두지 않았다. 정해둘 수도 없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 내가 어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분노가 나를 집어 삼킨다. 깊은 숨을 한 번 내쉰 후 몸을 내어 맡긴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담담한 새벽하늘이 열어놓은 하루의 시작. 그렇게 여행도 시작되었다.  ©박은빈

 

 

“놓고 가는 짐은 없을까?”, “입국심사는 통과할 수 있겠지?”, “영국에서 핸드폰 개통하는 것도 다시 알아봐야지.”, “숙소까지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기록은 어떻게 하지?”, “그러다 여행보다 기록이 앞서면 어쩌지?”, “그러고 보니 삼각대를 잊고 있었네!”, “사진을 잘 찍어뒀다가 잃어버리면 어쩌지?”, “메모리카드를 하나 더 사야할까.”, “버스는 어디서 어떻게 타는 거였더라.”, “혹시 버스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지?” 없거나 할 수 없는 것들이 수없이 의식의 바다에 몰아친다. 마치 해일과도 같아서 영국행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빠는 장시간 비행이 처음이여서인지 잠이 안 오는가 보다. 아까 읽었던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엄마는 코를 골며 귀여운 자태로 의자에 흘러내리듯 앉아 잠을 자고 있는데, 참 귀엽다. 동생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오는 드라마를 반짝이는 눈으로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가족들이구나.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알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는 나를 보는 것조차. 어쩌면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동시에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마음이 배와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런던과 시장

 

오차하나 없이 숙소에 도착했다. (조금 있다가 짐 이야기를 하겠지만) 다만 어깨와 흉곽이 짓눌릴 만큼 짐이 무거웠을 뿐이다. 아직 어깨가 다 펴지기도 전에 동생이 미리 짜둔 빼곡한 이틀짜리 런던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많은 것을 보고 싶다는 동생은 정말 많은 것을 보기 위해 걷지 못해 뛰어다녔다. 마음씨 좋은 엄마만 아니었다면 동생에게 힘들다며 스물두 번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동생에게 정말 고마운 일이 생겼다. 덕분에 버러우마켓(Borough Market)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겨울은 눈 대신 비가 내린다. 푹 젖은 런던의 모습  ©박은빈

 

시장에는 상점주인이 멍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거나, 미로 같은 노점상 안쪽에서 무릎 아래 전기난로를 벌겋게 켜놓고 한 할머니가 시린 몸을 데우신다. 하지만 버러우마켓에서는 뭘 살지 두리번거리는 할머니들만 마주쳤을 뿐. 상점 주인들은 모두 활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아저씨 아줌마들도 아닌 언니 오빠들이었다! 과일, 야채들은 또 어찌나 정성스레 놓여있던지! 어떤 과일가게에는 익살스러운 과일그림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분명 과일을 꽤나 사랑하는 사람이 꾸밀 수 있는 그런 장소였다.

 

 

 전날 밤, 어떻게 진열할지 2시간도 넘게 고민했을 것 같다.

자세히 보면 세심한 손길까지 느껴진다. ©박은빈

 

  

다양한 향신료를 팔고 있다. 상점마다 고유의 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과연 내가 알고 있던 시장이 맞는지 모르겠다. ©박은빈

 

 

여기는 치즈가게. 모든 선반마다 다양한 크기의 치즈들이 놓여있다.

저기 멀리 어여쁜 젊은 가게 주인들도 보인다. ©박은빈

 

우리나라에 있는 평범한 야채코너에 가면 평범하지 않은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입구에 서서 뭘 살지 두리번거리면 저쪽에 청경채와 애호박, 이쪽에 당근과 감자가 보인다. 김밥 속에 들어가는 당근을 사려고 조금 더 가까이 당근 앞에 다가서면, 이럴 수가. 똑같이 생긴 수십 개의 당근이 붉은 볼을 내비치며 나야 나~”하고 아우성친다. 두께, 모양, 크기까지 모두 다 똑같다. 마치 강남 압구정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똑같은 얼굴의 언니들 같다. 시골 버스를 타면 젊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할머니들의 브로콜리 머리만 쪼로록 창문에 기대있듯이 말이다. 사는 곳, 하는 일, 입는 것 심지어 먹는 것에서조차 다양함이 사라진지 오래다.

 

 

 

위 사진은 다양한 종류의 당근들아래 사진은 믿기 어렵겠지만 모두 감자다.

모양도 색깔도 태어난 곳도 다 다르다. ©박은빈

 

 

이곳 버러우마켓은 박물관과도 같다. 당근은 주황색은 기본, 흰색, 보라색, 미니사이즈까지 갖추고 있다. 뭐? 당근이 보라색이라고? 이상한 거 아닌가? 아니다. 당근의 역사를 살펴보면 주황색 이전에 보라색이 주로 사용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톰 스탠디지가 쓴 「식량의 세계사」를 읽어보시라.) 이뿐만 아니라 감자, 호박, 마늘, 양파의 종류가 각각 7가지도 넘는다. 고추, 브로콜리, 토마토 또한 다양한 품종들이 한 바구니에 담겨 있다. 그 앞을 서성이며 어떤 녀석을 집을지 고민하는 손님들을 보니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럽다. 누군가 찾고, 먹으니까 이렇게 모두 다 가져다놨을 것이다.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사는 런던의 특성과 함께 다양한 작물, 요리, 식문화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여행을 떠나기 전이다. 혼란스러운 집안 꼴 마냥 짐 싸는 마음도 혼란스러웠다.  ©박은빈

 

보통 자취를 하기 위해 집을 계약할 땐 1~2년의 기간을 잡는다. 세탁기와 냉장고가 옵션으로 구비되어있는 건 대게 기본이다. 별로 없을 거라 여겼던 이삿짐은 생각했던 것보다 늘 두 세배 늘어나 있다. 살면 살수록 짐은 늘어나고 또 늘어난다.

우리 가족도 1년간의 살림살이를 꾸려야 했다. 집을 계약하는 마음으로 여행배낭을 샀고, 우리는 그곳에서 1년을 머물러야 한다. 가방이 곧 방인 셈이다. 겨울을 지나 봄, 여름 가을 또 다시 겨울을 맞이할 수 있는 (가)방에는 어떤 살림살이들이 필요할까. 늘 베고 자던 베개가 아니면 잠을 한숨도 못자는 사람은 그 베개가 꼭 있어야 할 것이다. 매일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떡하지? 옷장에 걸려있는 수많은 옷들 중에 무얼 입을지 고민하는 게 취미라면? …. 가방에 피아노를 넣어 다닐 순 없다. 내가 입고 싶은 옷들도 다 가져갈 수 없다. 그야말로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곧 런던을 떠나 첫 번째 머물 공동체로 향한다. 그 전에 해야 할 일. 이삿짐 싸기! 풀어두었던 짐을 모두 다시 거두어 배낭에 집어넣어야 한다. 우걱우걱 짐을 넣는 아빠의 모습과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붙잡고 있는 배낭 지퍼를 보며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리는지 모른다. 하지만 웃음은 조만간 차오르는 배낭과 함께 한숨으로 가라앉는다. “이걸 또 어떻게 들고 가?”, “더 버리면 안 돼?” …

 

 

런던을 떠난다. 얼마 전에 집을 떠났는데, 그새 또 어딘가를 떠난다.

떠남을 반복하다보면 그 의미를 언젠가는 알게 될까? ©박은빈

 

우리가족의 욕심은 줄이고 줄여서 60kg이 조금 넘는다. 성인 남성 한 명을 데리고 다니는 꼴이다. 아무래도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어떤 이름으로 할까? 성인 남성이니까 줄여서 성남이? 한때 아들을 낳고 싶어 했던 엄마에게 아들하나 생긴 셈 치고 이름 하나 지어보라고 했다. 엄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더니 좀 있다가는 아빠에게 떠넘긴다. 이름하야 ‘대붕’이. 「장자」에 나온 대붕이는 하늘을 날 때 우리나라 전체에 그림자가 생길만큼 커다란 새란다.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는 아빠의 작명이다. 아무튼 대붕이. 대붕이를 등에 지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그리 걷다 보면 대붕이와 참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대붕아. 너도 밥솥은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아니. 1년 동안 지겹도록 빵만 먹을 텐데 오히려 난 다행이야.” “허어. 네가 짊어봐 한 번.” “너만 생각하면 어떡해~ 엄마가 특별히 원했던 거잖아.” 하지만 엄마를 위하는 마음은 배낭 짊어지기 전까지 유효할 뿐이다. 이번엔 대붕이가 먼저 내게 말한다. “너 옷이 너무 많아. 그래서 네 짐이 무거운 거야.” “그게 뭐가 많아! 그것도 5일 넘게 고심하며 줄인 건데!” “괜히 밥솥 탓하지 말고, 네 짐이나 생각해.” “그래도 유럽에서 옷 사는 것 보다야 낫잖아~” 점점 핑계거리가 늘어난다.

 

런던 한복판에 동양인 가족이 무지막지한 배낭을 들고 한 줄로 걷자니, 다들 그 모습을 보고 웃거나 놀란다. 길잡이 역할을 맡은 내가 가끔 뒤를 돌아봐도 웃기다. 암탉 뒤를 졸졸 쫓아오는 아기병아리들 같다. 사랑스러운 맘으로 대붕이를 바라보다가도 어떻게 살을 빼도록 할지 게슴츠레한 눈을 반짝인다. 과연 대붕이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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