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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촌스러운 여행

[촌스러운 여행] 촌스러운 가족, 촌스러운 여행 (5)

by 촌년 2014. 4. 29.

2014년 2월, 가족들과 유럽 시골마을로 일명 촌스러운 여행을 떠난 박은빈의 기록입니다. 박은빈과 그녀의 가족이 유럽여행 중 만나는 다양한 농촌과 농업 협태를 전합니다. 매달 첫째, 셋째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농저널 농담]

 

<농저널 농담> 박은빈

 

 

 

 

영국 런던에서 두 시간 거리의 레드필드(Redfield Community)와 남서쪽으로 멀찍이 떨어져있는 비치힐(Beech hill Community)을 연이어 찾았다. 이 두 공동체는 서로 다른 곳이지만 한데 엉키는 지점이 많아 하나의 글로 묶어보았다.

근 한 달간 함께 생활했더라도, 시기와 계절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이면은 당연히 알 수 없다. 여름이 되면 가냘프던 나무들도 울창하게 잎을 껴안듯이 그들에게도 다른 일상이 펼쳐질 것이다. 내가 만난 2014년 봄의 그들을 이야기하겠다.

 

 

 

오래된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비치힐에서) ⓒ 박은빈

 

 

 

 

풍경

 

30대 후반의 루시는 6살짜리 아들 손을 잡고 비치힐(Beech hill Community)에 들어섰다. 이미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대한 옛 대저택을 수리하여 살고 있었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 친구들을 초대하여 앞마당에서 큰 축제를 벌였다. 아이들의 장난기어린 웃음들이 여기저기서 끊이질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 생동감 넘치던 기억들은 벽에 붙은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루시는 60대의 할머니가 되었고, 지나온 세월을 함께했던 친구들도 모두 노인이 되었다. 그녀의 아들은 일찍이 살던 곳을 떠나고 없다. 들썩이던 대저택에는 열 명이 좀 넘는 식구들과 텅 빈 방들만이 남아있다.

내가 만난 비치힐은 아침에 낀 뿌연 안개가 아주 잘 어울리는 곳이다. 밝은 해가 떠있는 한낮에도 문 여닫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고 새소리만 재잘거린다. 적막함에 가까우리만큼 심심하고 조용하다. 오래된 과수원, 잡초가 나지 않도록 검은 비닐이 잔뜩 덮여있는 텃밭, 아담한 하우스 두 동, 이웃 주민들도 얻어다 쓰는 커다란 퇴비장, 한 마리의 늠름한 수탉과 아홉 마리 암탉들은 정지된 장면처럼 고요하다.

 

30대 후반의 멘디는 6년 전부터 레드필드(Redfield Community)에서 살고 있다. 이곳엔 서른 명이 넘는 다른 식구들도 살고 있다. 흰머리 할아버지부터 사춘기 소녀, 5살짜리 꼬마아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3~40대 싱글들이 가장 많다. 요 근래 연관검색어 1위는 얼마 전 마구간을 수리하여 만든 레드필드 센터이다. 센터를 통해 공동체나 관련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초대하고, 여러 활동을 벌일 계획에 다들 신이 났다. 공동체 내에 나무를 다루는 목수, 공공미술 활동가, 요가 강사 등등 식구들의 재능을 한데 묶어 팀을 만들기도 했다. 이번 주말에도 여러 사람들이 방문하기로 하여 아침부터 바삐 준비 중이다.

노을 질 무렵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온 집안은 숨바꼭질하는 어린 목소리들로 가득 찬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지자 배고픈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 부엌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벽에 기대어 수다를 늘어놓자,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 의자에 털썩 앉아 맞장구를 얹어놓는다. 곧 저녁 당번인 제임스가 식사를 알리는 종을 치면, 동시에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발소리가 우르르. 레드필드의 부엌은 하루 종일 외로울 틈이 없다.

 

 

 

하루는 레드필드에서 한국요리를 만들어 나눠먹었다.

매울까봐 걱정했던 떡볶이가 제일 먼저 사라졌다. ⓒ 박은빈

 

 

 

 

 

농사가 취미

 

비치힐의 작은 하우스에는 요리에 자주 쓰이는 허브들과 잎채소들이 가득하다. 잡초 하나 없이 일렬로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오래된 과수원에 들어서면 나무마다 목걸이를 매달고 있다. 누군가 애정을 가지고 돌본 흔적들이다. 도착한 첫 날부터 내 마음은 붕 떠있다. 공동체 식구들과 첫인사를 나누면서도 어떤 사람이 가드너일까?’ ‘저 사람인가?’ 안테나를 쫑긋 세우기 바빴다.

 

 

 

 

비치힐에 있는 공동 게시판, 저기 위에 ‘Garden'이라고 쓰여 있는 글씨가 보인다. ⓒ 박은빈

 

 

미로 같은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공동 게시판을 발견했다. 뜨악. 텃밭과 관련한 구역이 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다. 올해 무얼 키울지, 작물 별로 누가 담당할지, 어떤 걸 공부해야 하는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밭의 심장이라 불리는 퇴비장 노트였다. 보통 만들기만 해도 감지덕지인 퇴비를 가지고 시간별, 장소별로 기록까지 하고 있다. 그 옆에 두터운 종이들을 들춰보니 지난해 밭에 대한 데이터들이 주르륵. 한 해 농사기록도 부지런해야 겨우 매듭짓는데 말이다. 게시판 하나로 공동체 내에서 밭이 가지는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레드필드 식구들은 사십여 마리의 닭을 키운다. 녀석들이 낳아준 계란은 그동안 먹어본 것 중에서 가장 쫀득하고 고소했다. 들판에 풀어놓고 기르는 서른 마리의 양은 가끔 도축되어 저녁만찬을 돕기도 한다. 매일 아침 토스트에 발라먹는 꿀마저 직접 기르는 벌들이 받아준 것이다. 800평 크기의 밭에는 절반이 넘게 블랙베리, 레드커런트, 라즈베리, 사과나무가 심겨져 있다. 작년에 수확하고 얼려두었던 알롱진 열매들을 꺼내어 플레인 요거트에 풍덩, 꿀 한 술 퐁당, 믹서에 갈아 꿀떡꿀떡 삼키면! ~ 벌써 한국에 돌아가 과일나무를 심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밭에서 키워야 할 목록들이 하나씩 늘어난다.

 

두 공동체 모두 이 많은 일들을 취미로 한다. 모처럼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쉬는 날이야말로 본격적인 취미활동 시간이다. 양에게 줄 먹이를 창고에 정리해두거나 옥수수 심을 밭을 만들거나 블랙커런트 주변에 잡초를 뽑는다. 훌렁한 셔츠를 입고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중에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지어야지와 비슷한 말로 영영 미뤄놓지도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넓은 밑바탕이 되어주는 농()을 존경어린 시선으로 쳐다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문화적으로도 한 뼘이든 여덟 보든 마당을 가꾸는 습관이 자연스레 배어있다. 작은 시골 마을을 잠시 거닐기만 해도 집집마다 꽃으로 환영하는 걸 보게 된다. 어떻게 이 작은 공간을 이렇게 가꿀 수 있지? 정원 구경한답시고 남의 집 마당에 한참을 서있게 된다. 한집 지나고 다음 집 건너가기가 무척이나 아쉽다.

직장은 자주 바뀌어서야 안 되겠지만, 취미는 내키는 대로 변한다. 그러다보니 기분 좋을 적에 심어놓았던 보리지를 일이 바쁘다고 내버려두어 꽃도 못보고 땅으로 돌려주는 일이 더러 생긴다. 시작은 많지만 돌아오는 게 시원찮은 경우다. 하지만 밥상에 수저가 여럿이라면, 어느 날 정원에 보리지가 군락을 이룰지도 모를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 공동체 식구들이 모여 살림살이에 대해 나누는 시간은 꽤 중요하다. 덕분에 개인의 취미가 변하더라도 서로의 역할을 교환하거나 쪼개며 조화롭게 공백을 채울 수 있다. 함께 살아 좋은 점이다.

 

 

 

먹고 싶은 걸 앞마당에서 따올 수 있는 기쁨이란!

블렉커런트 주변에 잡초를 뽑고, 거름을 얹어주었다. (레드필드에서) ⓒ 박은빈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어느 날 브로콜리를 따던 중에 비치힐의 한 식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없으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할거야.”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는 언사라기에는 너무나 진지했다. 듣는 나도 숙연해질 정도였으니까. 사실 비치힐에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자주 멍하니 달력을 쳐다보곤 했다. 며칠에 떠나기로 했더라? 보아하니 그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고이 적어두었다가 우리들의 방문주간에 맞춰 풀어둔 게 분명했다. 괘씸한 마음이 들다가도 노년기에 접어든 이곳을 생각하면 곧 다시 측은해졌다. 사진 속에 있던 그 많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레드필드에는 토요일 오후 1시 경, 거실 소파에 늘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있다. 의문의 할아버지는 평일이면 어디론가 사라지신다. 돌아온 토요일 오후를 놓치지 않고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 왜 자주 보이질 않으세요?” “주말에만 사니까 안보였겠지.” 대답은 간단했다. 이어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원래는 여기에서 쭉 살았었어. 20년쯤 되었나. 근데 지금은 런던에서 지내. 이 시골에서는 일거리를 찾기가 어려워서 돈 벌려고 이사 갔지. 맘 같아서는 여기에서 계속 살고 싶지만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잖아. 그치?” 젊은 사람들만 떠나는 게 아니었다. 두 공동체에 살기 위해선 방 임대료와 식비를 지불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다들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잡지사 편집장, 건축가, 회계사, 정원사, 엔지니어, 사진작가 등등. 대부분 인근 도시로 매일 출퇴근을 한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남자아이도 직장 찾아 도시로 떠날 계획이라고 한다. 15년 후 즈음, 레드필드에 살고 있는 다른 아이들도 번듯한 직장을 갖기 위해 텅 빈 방을 두고 떠나겠지? 그때쯤이면 지금의 활기 넘치는 공동체도 한층 꺾여 바람에 흔들거릴지 모른다. 현재 비치힐처럼 몇몇 노인들이 남아 살림을 꾸리기엔 힘에 부칠지 모른다. 토막 난 사과는 누구로 하여금 둘러앉도록 만들지만, 토막 난 세대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더라도 허전함을 주기 마련이다.

 

 

떠나든 돌아오든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레드필드에서) ⓒ 박은빈

 

 

그래도 다행이다. 두 공동체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돌아갈 곳이라도 있지, 나를 포함하여 내 또래 친구들은 대게 고향이 없다. 즉 돌아갈 곳이 없다. 엉덩이 따끈하게 데워질라치면 늘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냉기 도는 낯선 곳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오늘도 헤매고 있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따라 흘러가는 인생들이다. 제 부모도 이렇게 살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순서다. 정작 고향이 있더라도 그 사실이 누설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나 지방일수록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해도 어딘지 모르거니와 지방에 살면 죄다 고구마를 키우거나 물고기를 잡는 줄 아는 사람들의 무식한 질문만 받게 된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도 있다. 돌아갔다가는 무리에서 튕겨져 떨어진 낙오자로 손찌검 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허무해져버린다.

작년 봄 어미닭이 알을 품던 모습이 떠오른다. 잠깐이라도 마당에 나와 모이 먹을 새도 없이 새끼를 끌어안던 어미. 어떤 상황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끝내 병아리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작은 발걸음으로 어미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어미닭이었다면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곳에 궁금함을 못 참고 달려갔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혹시나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품는 내내 불안해했을 것이다. 심지어 내 새끼가 혹시나 오리새끼는 아닐지 열두 번도 넘게 확인했을지 모른다. 흔히들 다른 사람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대고 좌절하거나 눈치를 본다. 어떨 땐 그 잣대가 제 건줄 착각한다.

나도 떠나고 떠돌며 살아와 뭐 하나 제대로 품어내 본적이 없다. 게다가 여행까지 하게 되어 지긋지긋하게 떠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 먼 곳에 떨어져서나마 글로 품어내고 있다. 매일 밤 삐뚤빼뚤한 글씨로 돌아가는 길을 잊지 않기 위해 하얀 종이를 가득 채운다. (다음 편에 이어 떠나온 곳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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