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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농촌페미니즘

[언니, 이거 알아?/스포주의] 가을에 뜬금없이 왈츠 한 곡 치실라예.

by 농민, 들 2017. 9. 21.

2차 청년여성농민캠프 참가자들의 공동 프로젝트. <언니, 이거 알아?>는 청년여성농민, 농촌에 사는 청년여성, 농업농민단체 청년여성 활동가 열 명이 서로에게 소개하고 싶은 콘텐츠를 이야기하는 연재 글입니다. 말하자면 청년여성농민의, 청년여성농민에 의한, 청년여성농민을 위한 콘텐츠. 이 연재는 3차 청년여성농민캠프가 열리기 전인 11월까지, 총 10회로 진행됩니다. [농저널 농담]



<청년여성농민캠프 참가자> 영지



8월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차가웠던 안골의 저녁 공기가 이제 서울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피부를 때리기 시작하네. 어제는 평소처럼 나시티와 쫄바지를 입고 자다가 추워서 깼어. 벌써 9월하도고 반이 갔다니. 난 캠프가 끝나자마자 이런저런 행사들로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냈는데, 바쁠 땐 시간이 나에 대한 배려도 없이 전력질주 하는 것 같아.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고, 차분하게 맥주 한 캔을 열어 우리 캠프 사진을 보고 있었어. 얼마 전에 들네 아부지가 키우신 고구마를 받았는데, 포슬포슬 삶긴 고구마 먹으면 김치 생각나잖아. 그래서 아쉬운대로 편의점에서 꼬마김치를 사왔는데 맛이 얼마나 허접하던지. 캠프에 덜꽃이 가져온, 내가 먹어본 중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 덜… 보고싶어여… ㅠㅠ 그리고 연근이 야물딱지게 말아준 담배는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어. 생각해보면 난 담배를 싫어하는데, 그날 밤엔 담배잎 냄새가 참 구수했어. 그리고 그냥 연근이 담배 마는 손 모양이 좋았던 것 같아. 



ⓒ영지

연근이의 착한 손꾸락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구, 어쩌다보니 내가 우리 두 번째 연재 편지의 첫빠따-가 되었네. 뭘 나눠볼까 몇주동안 고민했는데, 그냥 가장 최근에 엎드려 본 영화 이야기나 편하게 해보려고. 엄청 빡센 하루를 보내고 별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시덥잖은 로맨틱 코미디는 싫은 그 기분 아려나. 딱 그 맘가짐으로 찾아낸 영화가,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이야.



ⓒ우리도사랑일까



… 사실 영화를 받을 때만 해도 포스터를 제대로 안 봤는데.. 이제보니 무슨 마냥 달달한 로맨스 영화 같네. 근데 절대 아니라는 것….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낚였을 것 같아. 물론 여기저기 달콤한 요소들도 배치되어 있지만 결론은 씁쓸함으로.


내용은 단순해. 주인공인 여자가 남편이랑 행복하게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하다가, 혼자 떠난 여행에서 <어멋 당신 왜 이제야 내앞에 나타난거샤!> 싶은 남자를 만나게 되고. 하필이면 그 남자가 얼마 전 자기 집 앞으로 이사를 오게 된 거고. 남자에 대한 맘은 커져만 가고,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안락하지만 기름기가 쪽 빠진 느낌이고. 하지만 남편은 넘나 좋은 사람이고. 죄책감과 갈등에 고민하던 때,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가 있다는 걸 알고 괴로워하지만, 결국엔 보내준다는. 하지만 영화에서 젤 중요한 부분은 그 이후. 여자는 남자와 마침내 함께 하며 원하는 사랑을 이루지만, 결국에는 그 생활도, 이전에 남편과의 삶처럼 단물이 빠지게 된다는 것. 결국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


우와. 줄거리를 적고 보니까, 영화 내용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간단하구나 ㅋ. 그래, 정말 별 내용 없는 영화야. 근데 나는, (결혼을 해본 것도, 누구랑 같이 살아본 것도 아니지만) 그냥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들이, 구체적인 소재랑 배경은 달라진다고 하지만서도 그냥 나의 연애사들이 쭈룩 떠올라서 흠칫했어.


가령 이런 대목. 현 사랑을 지키고자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을 하는데, 상대방은 내 의도를 이해 못하고 그냥 무덤덤하게 구는거야. 그럼 나는 또 나대로 속상해서 삐지고 울고 그러는거지. 뭐 상대 입장에선 영문을 몰랐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런데도, 일단은 내가 기분 나쁘다고 하니까, 몇 시간 지나서 (영문을 모르는데도) 스윽 와서는 달래주고 기분 풀어주는 것. 이런 장면, 다들 나름의 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니?



ⓒ우리도사랑일까


아내는 자신의 애정표현을 쌩까고 요리에 집중하는 남편에게 화를 내. 용기내서 들이댔더니 왜 무시하는겨 하면서. 거기에 남편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며, 난 그냥 치킨요리 하고 있었는데 하는거지. 근데 아내는 그것도 너무 섭섭한 거고, 넌 맨날 치킨만 만들지 하는거야.



ⓒ우리도사랑일까



난 어떤 사람과 헤어질 땐 대부분 그랬어. 서로에 대한 이해가 편안함이 되고, 한편으로는 무덤덤함 또는 따분함이 되고. 그럴 거면 왜 연인이라는 구실로 만나고 있는거지 싶은거지. 난 아직 더 많이 쿵쿵거리는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잘 맞지 않나봐, 나랑 더 잘 맞는 사람이 있을거야 하는 생각이 커지면서 이별로 가는거지.


근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고, 여기저기에 상처를 내고, 막상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막상 황홀한 순간은 (영화 원제이자, 결국 함께 하게 된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 나오는 코헨의 노래처럼) 왈츠 한 곡 정도의 분량인 것. 왈츠곡이 끝나고 나면 관계의 시들함은, 아예 이전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 역대급에 다다르지. 그러니까 차라리 달달하진 않아도 편안한 이전의 관계가 괜시리 생각나고.


https://www.youtube.com/watch?v=ytdjYjM-cLg

Lenardo Cohen, Take this Waltz



ⓒ우리도사랑일까



낼 모레가 서른인데, 한편으론 집이든, 일이든, 사람이든, 점점 안정성을 찾으면서도, 한편으론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감정을 앞세우고 있는 나는 철이 없는걸까? 어떤 관계든 쫄깃함은 어느 순간에는 흩어져 버리는 걸까? 그런 거라면 대체 어느 순간에 이 정도면 되었다 할 수 있는걸까? 식어버리고 마는 연애가 문제일까, 나와 이 사람의 캐미가 문제인 것일까?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뒤엔, 어떤 감정이 들어도, 이 정도를 정당화하고 살아야하는 걸까? 이런 질문이 여전히 너무나 알쏭달쏭한 나. 우리 담번에 만나면 이런 이야기도 같이 하자.


자, 요롷게 첫 스타트는 가벼운 영화 이야기로 끊어보았어. 두세 번 볼만큼 명화는 아니지만, 캐나다 영화라 그런가, 엄청 드라마틱한 재현보다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표현과, 아기자기한 색채가 참 좋았어. 적당히 부담 없이 괜찮은 영화가 땡길 때 추천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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