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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농촌페미니즘

[농촌청년생활수기] 겨울삶

by 농민, 들 2018. 1. 17.

3차 청년여성농민캠프 참가자들의 생활글쓰기 공동프로젝트. [농저널 농담]



<강원도 홍천 농민> 덜꽃



땅을 일구며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계절을 빨리 느낀다. 준비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정신없이 여름의 하루하루를 벅차게 보내고 나면, 어느새 주변 산청은 노랗고 빨갛다가 다시 보면 온통 새하얀 눈으로 가득하다. 올해는 내 집을 지어 오롯이 홀로 겨울을 보낸다. 5년의 공동체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채우며 겨울을 나고 있다. 그렇게도 바랐던 독립된 삶이였는데 ‘왜 이리 준비를 안했을까’하는 후회도 들지만, 하나씩 채워야 하는 일도 즐거운 겨울나기라며 위안을 한다.



ⓒ 덜꽃



얼마 전 영하 25까지 떨어지는 우리 동네 날씨를 무시한 채 잠을 자고 일어나니,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얼어버린 게다. 이렇게 만든 나를 탓할 새도 없이 물을 녹여야 했다. 혼자서 발만 동동...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며 상태는 파악했지만 녹는 것까지는 나의 능력 밖이었다. 이번 겨울은 뜨거운 물 없이 보내야겠다고 체념한 채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동네 아저씨들이 산타처럼 오셔서 손을 비벼 가며 온수를 뚫어 주셨다. 마음의 부자가 된다는 게 이런 기분. 너무 감사하고 벅찼다. 벅차고 고마운 이 마음 표현을 다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 더구나 너무 답답해서 페북에 올렸더니, 동네에 사시는 얼굴도 한번 뵌 적 없는 페친님께서 걱정하며 도와주겠다고 까지 하신 일도 감동이었다.


도시였더라면 전문가를 불러 해결할 일이겠지만, 서로 도와가며, 배워가며 지낸다. 귀농을 준비할 때 꿈꿨던 거창했던 자급자족의 삶을 생각해보며,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낀다. 따뜻한 물로 설거지도 세수도 할 수 있어 어찌나 기쁜지. 사실 아직도 걱정되고 두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씩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물론 도시로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지만, 또 이렇게 겨울살이를 하는 것도 못지않게 매력이 많다. 지인들은 집은 추우니까 와있으라는 인사도 많이 하지만, 이 청량한 공기와 넓은 시야, 새소리, 산짐승들의 발자국들을 두고 어디 가고 싶은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고라니 발자국이 있는 길에 무른 감을 놓아두고, 며칠 지난 후 갔더니 깨끗하게 먹어놓았다. 혼자 얼마나 흡족하던지. 이런 식의 교감도 좋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조용하고 편안한 겨울, 책을 읽거나 정적인 일에 딱 맞는 계절이다. 수세미도 떠서 사람들 만날 때마다 선물로 주고, 그간 밀렸던 책도 보고, 산책하며 동네 못 가본 공간도 찾아가보고. 이런 시간이 주어주는 것은 올 한해 농사 잘 했다는 선물이라 생각하며, 오롯이 홀로 겨울나기를 올해도 잘 지내보려 한다. 문제는 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거. 더 빨리 가기 전 나만의 시간, 나만의 느낌들을 많이 채워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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