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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빛으로 그린 농사

[빛으로 그린 농사] 작은 볍씨가 논으로

by 농민, 들 2014. 5. 3.

풀무학교 환경농업전공부 2학년인 문수영이 학교와 지역에서 살며 배우며 겪게 되는 것들을 2주에 한 번씩 빛으로 그려냅니다. [농저널 농담]

 

작은 볍씨가 논으로

-  못자리 설치 이야기  -

 

<농저널 농담> 문수영

 

 

 

 

ⓒ 문수영

 

이틀 전, 미리 물을 받아놓은 논이 참방하게 잠겼다. 금요일 아침 8시부터 부랴부랴 물장화를 신었다. 올해는 1학년 친구들 덕분에 농사일이 손쉽다. 고작 네 명뿐인 2학년이 힘겹게 해내는 일을 그들은 여럿이 모여 나오는 밝은 기운으로 뚝딱 해치워버린다. 그래서 계획보다 볍씨 파종도 일찍 끝났고, 일이 조금 앞당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할 일은 많았다.

 

줄자, 못줄, , 레이크, 써레를 챙겨 하이디논(학교 바로 밑에 있는 갓골논들의 못자리논)으로 급하게 내려갔다. 줄자를 길게 늘어뜨려 180cm 길이의 두둑을 쟀다. 볍씨가 담긴 모판을 놓는 두둑을 만들기 위해 흙을 떠올려 물길을 내주고, 레이크로 두둑의 거친 부분을 정리했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써레를 들어 두둑 위를 고르게 다듬어주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선욱이와 여연이가 호흡을 맞춰서 써레질을 하고 있다. 가끔 1학년인 선욱이와 여연이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서로를 못살게 하는 장난을 주고받을 정도로 장난끼가 많다. 이 순간만큼은 그런 둘의 아주 작은 숨소리도 멎은 느낌이다.

 

 

ⓒ 문수영

 

다음날, 더 큰 못자리가 있는 문산논으로 넘어갔다. 흐린 날씨 탓에 모두의 얼굴빛도 흐리고 기운이 빠져있었다. 사진 찍기도 어려웠다. 날이 맑아야 물 받아진 논의 풍경이 가장 빛나 보이는데 말이다.

 

학교에 있는 트럭과 갓골목공실에서 빌린 트럭 4대를 꽉 채운 모판을 하루 반나절 동안 계속 날랐다. 일명 모판 릴레이다. 모판을 나를 때는 정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서 해야 한다. 혹여나 정신을 쏙 빼고 있다가 모판을 엎어버리거나 이미 줄 맞춰 놓은 모판에 진흙이 튀어버리면 작년에 방울방울 땀 흘려 씨 뿌리고 거두었던 볍씨들을 못 쓰게 되어버리는 거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장쌤은 입이 닳도록 우리더러 미스코리아처럼 우아하게 걸으라고 하신다. 농사는 해를 거듭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땀들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더 소중하고 절실히 와 닿는 것 같다.

 

이 날 모판 2개가 엎어졌다. 선생님들이 우스갯소리로 두 달을 꼬박 굶으라고 하신다.

 

 

 

ⓒ 문수영

 

10시 반에 도착해야 할 새참이 11시가 다 될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목 타고 배고픈 사람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차 소리에도 눈이 휙 돌아가고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는데 하마터면 전공부 농민 봉기가 일어날 뻔 했다. 나도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제발요!”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저 멀리 트럭이 보이자 다들 하던 일은 멈추고 냅다 뛰었다. 뛰어갈 때만 해도 씩씩거리며 화를 내다가 차려진 샌드위치, , 과자를 보자마자 모두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해맑게 웃음을 되찾는 사람들을 보니 그 모습이 참 웃기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특히 제일 열심히, 야무지게 먹던 예이 언니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 문수영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니 눈 깜짝할 새에 손이 빨라졌다. 마지막 모판까지 나르고 나서 새하얀 부직포를 씌우는 것까지 척척 진행됐다. 볍씨가 싹을 틔우고 어린 모로 자라날 때까지는 적절한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줘야 해서, 부직포를 씌워 관리해준다. 부직포를 씌울 때도 결코 진흙이 튀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직포를 끌고 가는 사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드문드문 흙을 올려놓는 사람, 또 그 사이에 흙을 올려놓는 사람 여섯이서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손도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리 같은 초보 농부는 조급하게 빨리 움직이느니 조금 느리더라도 정확하게 해내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농사는 기다리고 참는 마음이다.

 

 

ⓒ 문수영

 

요즘의 나는 일도 하고 사진도 찍는 욕심쟁이로 산다. 자연과 어울려서 일하는 특유의 농사일 풍경과 함께 일할 때 드러나는 사람들의 천진난만한 표정들을 눈으로만 기억해두기에는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주 못자리 설치 주간에는 사진을 찍는 게 눈치 보였다. 안 그래도 일할 사람이 적어서 고생하고 있는 와중에 사진 찍겠다고 슬쩍 자리를 비우는 내가 얼마나 얄미워 보였을까. 지친 얼굴들을 보며 미안함을 느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혹시 못자리논 물이 모판 위로 넘쳐 볍씨가 썩진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하나뿐인 내 여자 동기 수경이랑 둘이서 우산을 쓰고 질척이는 길을 따라 하이디논으로 갔다. 논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보니 다행히 넘치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비가 올진 모르겠지만,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 수로에 물이 잘 내려갈 수 있도록 손으로 파주고 왔다.

 

2학년이 되서야 끝이 진짜 끝이 아니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2학년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것도 봐야 한다는데 그건 아직은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못자리는 끝났어도 우리의 한 해 농사는 이제 시작이다. 촉촉한 단비와 함께 곧 무엇이든 심는 달 5월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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