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빛으로 그린 농사

[빛으로 그린 농사] 이삭 팰 무렵

by 농민, 들 2014. 9. 13.

- 쌀 이야기 -


<농저널 농담> 문수영 



ⓒ 문수영

바야흐로 이삭이 패어나는 때이다

논에 빽빽하게 들어선 벼들은 이제 더 이상 위로 자라지 않는다. 통통한 열매들을 저마다 만들어낸다. 벼꽃은 새벽에만 피는데 이삭 주머니 안에서 꽃이 터지고 나서는 조그맣고 하얀 수술이 이삭 사이사이에 피어오른다. 저녁 어스름할 때 논길을 걷거나 논둑에 앉아 있으면 코 밑으로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벼꽃 냄새다. 다른 꽃향기처럼 특별하진 않지만 우리가 매일 꼭꼭 씹어 삼키는 밥맛처럼 편안하다. 꽃을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면 풀 아래 숨어 쉬던 개구리는 사람 발자국 소리에 놀라 물속으로 퐁퐁 뛰어든다. 작은 물살이 일어나고 개구리 헤엄치는 소리가 하나의 노래가 되어 귓가에 울려 퍼진다.

 

이 계절, 논의 모습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천천히, 그리고 그림같이 흘러가곤 한다.

 




ⓒ 문수영


밭도 그렇지만 논은 특히 더더욱 여러 모양의 땅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길쭉하고 동그랗고 조금 모난 제각각의 논은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니 땅, 내 땅이 없다.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그 자체의 삶이다. 그 속에서 벼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몸짓으로 바람을 타기도 하고 햇볕을 쬐기도 하고 이슬방울을 온몸에 대롱대롱 매달고 있기도 하고 호기심 어린 작은 벌레들에게 , 여기!” 하며 팔을 턱 하니 빌려주기도 한다. 뿌리는 단단하고 깊어도 위에선 마음 가는대로 자유롭게 누빈다.

벼꽃이 피고 나서도 이삭이 정말 완전해지려면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조용한 움직임을 기다려야 한다. 선명한 초록빛에서 누르스름한 색으로 짙어질 때 곡식이 여문다고 하는데 하루하루 볼 때마다 색이 다 다르다. 어떤 곳은 노란빛, 어떤 곳은 연한 초록빛이다. 거기서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고 알맞은 시기에 거두는 것뿐이다. 농부의 몫은 그것밖에 없다. 사람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일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이 없기에.

 

어쩌면 우리 눈으로는 알지 못하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무슨 재미난 대화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벼가 햇님에게 별에게 달에게 그리고 바람에게 작은 벌레에게 말을 건네주고 받을 때 훌쩍 자라고 익어가는 게 아닐까. 논은 이들을 안아주는 커다란 품이다. 요즘의 나는 그 품에 폭 안겨 쓰담이는 손길을 받고 싶어진다.

 



ⓒ 문수영



멋모르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단순히 우리보다 몸집이 작다면서 지나치는 생명들이 한데 모여 있고, 별에 별 이야기들이 가득한 바로 이 논에서 세네 알의 볍씨가 줄지어 떨어져 몇 천 알의 볍씨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쌀알은 기계와 컨베이어벨트가 무수한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도, 누가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또 그럴 수 있는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 옛적 할머니들이 밥상머리에서 쌀 한 톨도 남겨서는 안 된다고 하시던 말씀은 그만큼 쌀 한 톨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보다 매년 씨 뿌리고 키우고 거두면서 엮어지는 농부들과 자연의 이야기가 가슴 안에 녹아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전공부 안에서 농사를 배우면서 늘은 것이라고는 조금 힘이 세진 것과 몸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해낼 수 있는 삽질, 낫질이 전부이지만 우리의 먹거리와 땅, 삶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나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은 거대하고 빠르며 무자비하다. 이제는 땅을 파대고 산을 헤치고 강을 막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적으로 먹고 사는 일,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없애려고 한다. 이 작고 하얀 쌀알은 매번 다른 1년마다의 시간을 고이 간직해온 씨앗이며 없어서는 안 될 주식이며 생명들의 집이며 지금은 거의 사라졌어도 오랜 세월동안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서 삶을 영위해왔던 우리 농부들의 뿌리이다.

 

최근 씨앗주권 문제와 더불어 쌀 전면개방 문제가 집중되면서 전공부를 입학했을 적에 선생님들이 해주신 말이 계속 떠오른다. 농사일을 기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낮에 땀 흘려 일하고 나서 내가 느낀 것, 본 것, 한 것들을 나의 이야기로 잘 풀어내는 것이 농부가 하는 밤일이라고. 한 해의 농사는 날씨, 농부들의 움직임, 일하면서 있었던 일화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책으로 두고두고 쌓여서 전해질 수 있는 역사가 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먼 시간을 거슬러온 우리네들 할머니처럼 말이다. 지금 이곳에서 일하며 공부하며 나와 나의 동료들이 가진 이야기를 전하고 기록을 담는 것이 내 몫일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