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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빛으로 그린 농사

[빛으로 그린 농사]한일자로 늘어서서 입구자로 심어를 보세!

by 농민, 들 2014. 6. 25.

 풀무학교 환경농업전공부 2학년인 문수영이 학교와 지역에서 살며 배우며 겪게 되는 것들을 2주에 한 번씩 빛으로 그려냅니다. [농저널 농담]

 

 

한일자로 늘어서서 입구자로 심어를 보세!

-손 모내기 이야기-

 

<농저널 농담> 문수영

 

 

 

ⓒ 문수영

 

못자리 설치 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흘러간 시간만큼 흙에 파묻혀 보이지 않던 볍씨는 어느새 초록색 싹을 틔워냈고, 어서 논으로 내보내달라고 애원하기라도 하는 듯이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

 

우리는 짧디 짧은 2박 3일 휴가를 마치고 실습주간을 맞았다. 실습주간은 모내기철과 일찍 뿌려놓은 양파, 마늘, 감자, 완두콩의 수확 시기를 말한다. 이 때는 오전, 오후 다 논밭으로 나가 농사일을 하며 지낸다. 어쩌면 앞서 했던 모든 실습이 이 힘들고 바쁜 주간을 위한 몸 만들기였는지도 모르겠다며 선생님들의 비밀스러운 조련술에 감탄하기도 하는 요즘이다.

 

한 달 동안의 실습주간에는 매년 전공부를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도 있다. 경기도에 있는 청계자유학교 학생들이 2주간 농사실습을 하러 오는 것이다. 다 합쳐도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전공부의 한적한 분위기가 자유학교 친구들이 오면서부터는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낯선 사람들과 어수선하지만 왠지 모를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코앞으로 다가온 모내기 날로 인해 잔뜩 긴장해있던 마음이 약간은 풀어져가고 있었다.

 

 

ⓒ 문수영

 

모를 심기 전에 제일 먼저 준비하는 일은 역시 모판 나르기다. 모판 구멍 사이사이로 뿌리를 내린 꼿꼿한 모는 아직 씨앗 상태였던 볍씨가 담긴 모판보다 훨씬 무게가 무겁다. 삽으로 모판을 들어 엉켜있는 진흙과 뿌리를 호미로 삭삭 긁어낸 뒤 우리는 하나의 긴 줄을 만들어서 묵직한 모판을 날랐다. 다른 사람에게 모판을 건네준 사람은 또 모판을 들고 오는 사람을 마중 나가고, 그렇게 서로서로 두 손 벌려 푸른 모를 맞이했다.

 

 

 

 

 

ⓒ 문수영

 

모쟁이는 모를 한 손에 잡기 좋을 만큼의 크기로 찢어서 논 군데군데에 던지며 부족한 모를 채워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모 심는 사람들을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인데, 올해는 사람이 적은 탓에 따로 모쟁이를 두지 않고 우리 모두 모쟁이가 되어 미리 모를 알맞게 논 안으로 던져놓았다.

 

누가 더 멀리 던지나 시합하는 친구들, 철썩이며 튀는 물방울의 차가운 감촉에 비명을 지르는 친구들, 논둑 달리기를 하는 친구들, 모판을 정리하는 친구들, 논 안에 빠져 허우적대는 친구들. 가장 생생한 땅의 느낌을 밟고 만질 수 있는 논은 참 신기한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누구나 어린아이가 되었다.

 

 

 

ⓒ 문수영

 

드디어 손모내기. 아침이 되자 전날 깨끗이 빨아놓은 물장화를 신었다. 살갗이 탈까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손수건도 목에 둘러맸다. 구름이 많은 선선한 하늘 덕분에 땀이 별로 나진 않았다. 모를 심지 않은 논이라고는 우리 논밖에 없어서 그런지 주위가 고요했다. 다랑이마다 물이 가득 받아져 있는 걸 보니 얼른 논 안으로 들어가 모를 심고 싶어졌다.

 

손모내기를 할 때 필요한 준비물은 뭐니 뭐니 해도 딱 3가지다. 그건 바로 못줄과 오래 서있어도 괜찮은 튼튼한 다리, 그리고 즐거운 노랫가락이다. 못줄잡이가 팽팽히 못줄을 띄우고 우리는 모 한 주먹씩을 든 채 줄 앞에 한 일자로 늘어섰다. “시작!” 하는 소리와 함께 못줄에 그려진 빨간 끈에 맞춰 모를 심어나갔다. 손의 마디, 주름 하나가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몸에 새겨진 어르신들은 못줄에 그려져 있는 빨간 끈을 꽃이라고 부르신단다. 그래서 모를 심을 때마다 꽃 아래에 심어보자 하신단다. 새빨간 꽃잎을 따라 모를 꽂으면서 모 얘기, 사람 얘기, 사랑 얘기 실컷 하고 나니 어느새 논에 초록이 꽉 들어차있었다.

 

장쌤은 농부가 매일 논밭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고 하셨다. 농사를 짓는 일이 예술 행위와 같다고. 이앙기처럼 정확하진 않지만, 여러 명의 어설픈 손끝으로 그려낸 논이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게 멋진 일처럼 느껴졌다. 빛과 바람에 따라 흘러가는 논의 물살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지 모르겠다. 평생 이렇게 아름다움을 느끼며 농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 문수영

 

첫날의 모 심기가 끝나고 해맑게 눈동자를 굴리는 솔찬이와 수경이는 꼭 어릴 적 마을을 누비던 골목대장들 같다. 일이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몸이 고될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더 힘이 넘쳐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일까? 아마도 논 안에 들어가 맨손, 맨발을 가득 담으면서 땅이 전해주는 기운을 받았나 보다. 그들의 얼굴빛이 너무 사랑스러워 꽉 끌어안아주고 싶다.

 

 

ⓒ 문수영

 

보너스 사진. 풍악을 울려라.

 

손 모내기 이틀째 날,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용신제가 열렸다. 사실 말이 용신제이지, 우리가 한 판 흥겹게 놀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거다. 이 날을 위해 악기를 쳐본 사람이든 안 쳐본 사람이든 상관없이 풍물패가 꾸려졌다. 나도 풍물패 중 한 명이었는데, 악기와는 전혀 친하지 않던 내가 장구를 치려니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팔에 속이 상하다가도 ‘반드시 멋지게 장구를 치고 말리라!’는 오기가 생겨서 뜬눈으로 밤늦게 연습하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가는 장구 치는 솜씨에 어깨가 으쓱으쓱했고, 무엇보다 풍물패 친구들과 용신제를 준비하면서 함께 모이는 마음들이 느껴져 즐거웠던 것 같다. 주말에도 악기를 동여매고 밖으로 나가 3시간씩이나 쳐댔으니 말이다.

 

용신제날, 조금은 여유롭고 조금은 긴장된 모습으로 둥그렇게 모였다. 꽹과리 소리가 쨍쨍 울리고 장구, 북, 징도 연달아 소리를 더했다. 오고가는 눈짓으로 가락소리를 맞춰가며 길놀이까지 마치고 나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붉어진 얼굴들로 방방 소리를 지르고 뛰었다. 우리가 해냈다는 사실에 기쁘고 신기하고 흥분했다. 그리고 악기를 친 순간이 짧아서 더 치고 싶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다. 선생님들이 그 마음을 아셨는지 그 뒤로 우리는 새참을 먹고 “일 하기 전에 한바탕 놀고 가야지.” 하는 성화에 못 이겨 몇 번이나 더 풍악을 울렸다.

장구를 치는 바람에 사진 찍을 손이 없는 나를 대신해서 이 사진은 수경이가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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