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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빛으로 그린 농사

[빛으로 그린 농사] 조촐한 갈무리

by 농민, 들 2014. 12. 4.

<농저널 농담> 문수영




ⓒ 문수영


ⓒ 문수영


학교 정원을 수놓던 붉은 화살나무는 어느 날 밤 내리던 굵은 비에 잎을 다 떨어뜨렸다. 다시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새벽마다 차가운 서리가 옅게 흩어 내리면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지붕 위에도 마당 안에도 새하얀 가루들이 쌓여서 하나의 길을 만든다. 나의 가까운 친구는 계절마다 특정한 냄새가 있다고 했다. 지금은 아주 춥고 시린 시절이지만 숨을 깊게 들이쉬면 시원한 냄새가 난다고. 그게 참 좋다고. 나도 콧물을 훌쩍이며 오들오들 몸을 떨다가 큰 숨을 들이쉬어 본다. 맑다.


ⓒ 문수영


ⓒ 문수영


ⓒ 문수영


갈무리 잔치 때 사진을 올렸으면 좋았겠지만 그 날 계속 무대에 올라야 했던 탓에 남겨둔 사진이 없어서 추수감사제 예배 때의 즐거운 얼굴들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갈무리 잔치는 조용한 달빛 아래 작은 난로, 긴 의자에 서로 붙어서 몸을 녹이는 사람들, 노랫소리와 시를 상상하며 읽어주세요.

며칠간 전공부는 추수감사제 기간으로, 그렇게 떠들썩하지도 않고 조용하지도 않은 나날들을 보냈다. 한 해 농사일을 갈무리하며 1년 동안 정성들여 심은 것들에 감사하고 기도하는 시간들, 그리고 꾸준히 공부해왔던 과제들의 발표와 마을 이웃들을 초대해 아주 소박하고 따뜻한 잔치도 즐겼다. 우리의 잔치는 먹고 마시고 시를 나누고 노래하고 웃는 것이 전부였는데 어쩌다보니 준비되어있지 않던 사람들도, 초대를 받은 손님들도 한 사람씩 자리에서 나와 자기의 이야기들을 정답게 들려주었다.

풀무학교 고등부에 다니는 어떤 친구는 기타 한 대를 달랑 들고 나와선 갈무리에 대해 말하기를, 끄트머리라는 말에 머리와 끝이 한데 들어가 있듯이 끝은 우리가 아직 꺼내지 않은 또 다른 시작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말을 기억하며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덜렁거리는 몸짓에, 손 따로 목소리 따로 어색하고 어설픈 노래였지만 아주 열심히 그 자리에 앉아 그 순간에 모인 누군가들을 위해 노래하는 그 아이가 너무 멋져서 우리들은 끊긴 박자에 박수소리를 얹어가며 모두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잔치의 끝은 늘 가늘고 길다.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술 한 잔 돌려가며 다시 이야기를 꽃피운다. 들뜬 마음들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기웃거리는 거다. 달빛이 밝고 난로에는 더 이상 태울 게 없는 재만 남았다. 의자에 엉덩이를 비비며 따뜻한 온기를 다시 데운다.


ⓒ 문수영





ⓒ 문수영


요즘 들어서 귀가 시릴 정도로 추웠던 그 해 봄날, 학교에 처음 들어섰던 때가 생각난다. 선생님들이 저마다 하신 똑같은 말씀들. 여기서 우리는 허물을 벗어내는 거라고. 서리를 잔뜩 맞은 고구마를 캐면서, 너무 오래되어 다 떨어져버린 가지를 보면서, 온 사방으로 터지는 팥알을 손으로 일일이 주우면서 제때 거두지 않아 안쓰럽게 밭 한 구석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들이 꼭 나의 못나고 부끄러운 모습들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밭에서 예쁜 꽃들도 피어났고 제각각 모양으로 자라난 농작물들을 한 아름 품에 안아 기쁘게 식당으로 들고 갔었다. 가끔씩 아랫밭 할머니들이 바지런히 일하시는 모습도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구경했다. 아직은 아쉬운 마음이 많아서 잘한 것보다 못한 것에 더 마음이 가나 보다. 

호미질도 삽질도 낫질도 씨를 뿌려서 싹을 틔어냈던 일도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내가 이제는 어엿한 졸업을 두고 있다니. 모든 것에 시작이 있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아주 흔한 말이 갑자기 확 몸으로 다가온다. 농사를 마주할 적에 땅에 들러붙어 끈질기게 해나가는 법도 배웠지만 날씨가 허락하지 않을 때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을 줄 아는 법을 배웠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어수선해지면 돌아가라고, 돌아가라고 신기하게도 나를 쉬게 해줬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다른 일에 있어서도 그 방법은 늘 같았다. 내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은 잠깐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갈무리 철이 되면 밭에서 나온 씨앗들이 광을 채운다. 곧 농부들의 기나긴 겨울 휴가가 올 것이다. 마지막까지 바쁜 학교 일로 그동안의 일을 찬찬히 정리하고 비우는 일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어찌어찌 마무리 지을 건 다 지은 것 같다. 수고했다, 그 한 마디 말로 나를 북돋아주고 싶다. 어쩌면 허물을 벗어내는 일이 별다른 게 아니라 기쁠 때 맘껏 기뻐하고 아플 때 온몸을 다해 아파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만난 것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일렁임과 생각들을 자유로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조촐한 갈무리를 마친다.




1년 동안 찍었던 사진들 중 좋아하는 사진들을 골라서 영상으로 만들었어요. 

그동안 사진을 드문드문 올렸었는데 이 영상을 보면서 빛으로 그리는 농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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