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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빛으로 그린 농사

[빛으로 그린 농사] 벼바심 하러 가유

by 농민, 들 2014. 11. 2.

풀무학교 환경농업전공부 2학년인 문수영이 학교와 지역에서 살며 배우며 겪게 되는 것들을 2주에 한 번씩 빛으로 그려냅니다. [농저널 농담]


<농저널 농담> 문수영




ⓒ 문수영


가을빛은 아름답다. 여기저기 내려앉아 머물면서 전체를 환하게 비춰준다. 그래서 가까이 보아도 빛이 반짝이는 걸 알 수 있고 멀리서 보아도 빛나는 풍경이 눈 안에 가득 들어온다. 이렇게 일주일 내내 따뜻하고 맑은 기운의 날씨를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지금 한 철 뿐이라고 한다.

 

매일 밤이 지나면 길가에 있는 주변 논에서는 하나 둘 논이 비워진다. 어느새 벼 베기가 한창이다. 학교에서도 남은 밭일들을 하며 벼 베기 알맞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 충청도에서는 벼 베기를 벼바심이라고 부른다. 하루가 다르게 노란빛이 더해지는 논을 보면서 바심이라는 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받드는 마음일까, 바로 서있는 힘일까 그 의미는 모르겠지만 곱씹을수록 참 예쁜 말이다.




ⓒ 문수영


갑작스레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벼를 벨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음날 아침에 내리는 햇살이 빗방울을 다 말려주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신발장에 올려둔 낫이 한가득 담긴 상자를 꺼내들고 녹이 슨 낫들, 조금 괜찮은 낫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숫돌에 슥삭슥삭 갈았다. 이가 빠진 못생긴 낫도 오늘 만큼은 예쁘게 반짝거렸다.

 

시끌벅적한 소리를 내뿜는 덩친 큰 콤바인을 신호로 우리는 낫을 하나씩 부여잡고 줄지어 논으로 뒤따라갔다. 왠지 모르게 한껏 들뜬 우리들은 재잘재잘 입을 놀려대면서도 나는 한편으로는 긴장됐다. 작년에 벼를 벨 때 논을 완전히 다 못 말린 탓에 콤바인이 빠져 속상해 하던 언니들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누가 보면 화났나 싶을 정도로 미간에 주름이 팍 생겼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아니, 괜찮아야만 해!’ 제발 논이 다 말라있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며 논 안으로 발을 옮겼다.

 

발아래의 논바닥은 딱딱하고 쩍쩍 갈라진 모양의 땅이 되어 있었다. 조심히 한 발자국 내딛어도 모든 바닥이 딱딱했다. 질척한 논에서는 휘청이던 걸음걸이가 꼿꼿하게 바뀌었다. 아주 가볍게 그리고 힘차게 걸으며 콤바인이 안으로 잘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다시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더 이상 물장화는 필요 없었다.

 



ⓒ 문수영


콤바인이 큼지막한 논들을 베고 있을 동안 몇몇은 작게 달린 논을 낫으로 베기로 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벼를 거두고 한 사람이 벼를 날라서 모았다. 수북이 모인 벼를 감싸 묶고 볏단을 차곡차곡 지게에 쌓아 올렸다. 알곡이 통통하게 달려서 제법 무거운지 지게를 지고 일어서다 털썩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면 볏단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올리고 또 올렸다.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며 몸에 안 보이는 근육들까지 써서 볏단들을 다 나르고 나니 다들 신이 났다. 등판 넓은 정희가 갑자기 지게 위로 수경이를 태우고 논길을 걷는다. 넘어질까 위태로운데 어쩐지 웃긴다. 입을 쩍 벌리고 남아있던 예이언니, 혜순언니도 졸졸 뒤를 쫓아간다.

 



I

ⓒ 문수영


해가 산에 턱 걸리고 빛이 사그라질 때 즈음 마지막 논을 남겨두고 콤바인이 말썽을 부렸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게 부품이 빠졌다고 했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콤바인을 수리하는데 멀리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제서야 사람들 얼굴도 가깝게 보고 콤바인을 잘 고치고 있는지 못 고치는지 농담도 던져가며 다리를 쭉 뻗었다.

 

이 날 결국 콤바인은 살아나지 않고 다음날 나머지 논을 벨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눈 뜨자마자 방 창문 너머의 들판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분명 똑같은 나무, 똑같은 들인데도 바깥의 세상은 매번 다른 색으로 나를 맞이한다. 하루는 몸이 축 늘어져서 아침체조도 못 나가고 있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같이 방 쓰는 언니가 나를 붙잡아 흔들어 깨웠다. “수영아! 지금 하늘은 꼭 봐야 돼. 보랏빛이야.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거 안 보면 안 된다니까.” 방금 전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내가 언니의 부추김에 벌떡 일어서서 창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정말 보랏빛이 낮게 깔려 들판을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 둘은 어쩔 줄 몰라서 이쪽 창문, 저쪽 창문 옮겨 다니며 짧은 순간을 눈에 담았다.

 

소리 없이 여름이 훌쩍 가고 가을을 걷어 올리는 날도 마무리 되어간다. 계절은 신비롭다. 느리게 가다가 또 빨라지고 뒤돌아보니 저만치 앞서 가있다. 그저 묵묵히 오고 간다. 흙에 발을 묻고 있으면 뿌리박고 자라는 나무들처럼 나는 그 계절 안에 있을 수 있다. 이제 바람은 차갑고 된서리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땅도 조금씩 쉬어가려 하나 보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한해살이도 천천히 걷어 올릴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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